특집 인터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결국 과학입니다
: 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하석 석좌교수가 경험한
과학학 사이 경계 넘어서기
민병웅1 · 구본진2
1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2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koobon1998@snu.ac.kr
과학학과가 공식 설립된 지 2년이 되어 간다. 학과 내 학생들이 공부하는 내용은 협동과정일 때와 달라지지 않았지만, 학업 여건은 더 좋아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공 이름이 바뀌면서 외부에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소개해야 하는 일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학과 이름에 과학사 혹은 과학철학이라는 표현이 빠져서 협동과정의 이름으로 학위를 받으려는 학생도 있고, 과학학이라는 표현이 협동과정의 긴 명칭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느끼는 학생도 있다.
학과의 명칭 변화에 대한 다양한 반응에서 드러나듯이 과학학과 구성원들은 전공이나 연구 주제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다. 때로 이러한 다양성은 전공 간 간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과학사 전공자나 과학정책 전공자들이 과학철학 수업을 수강하거나 연구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드물고, 과학철학 전공자들도 과학기술학 수업이나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학학 내 일종의 ‘두 문화’(혹은 그 이상)가 있는 것 같다는 아쉬움도 들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학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려면 우리는 어떤 일들을 해야 할까? 또 그러한 작업은 왜 필요한가? 과학철학자이자 과학사학자로 ‘통합된 과학사 및 과학철학(integrated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해 온 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하석 석좌교수와의 문답을 통해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지난 8월 13일, Zoom 플랫폼을 통해 영국에 체류 중인 장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구본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하석 선생님께서는 교육방송 강연 시리즈라던지, 국내에 번역된 『온도계의 철학』이나 『물은 H₂O인가?』 같은 책들로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진 과학학 연구자이신데요. 최근엔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에 계신지, 연구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장하석: 제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과학사 연구는 전지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꼭 전지의 역사만이 아니라 전지라는 것이 발명됨으로써 할 수 있게 된 모든 일들. 예를 들어 전지를 발명하자마자 전기 분해가 된다는 거를 발견하잖아요. 그렇게 함으로써 화학을 보는 눈이 확 바뀌어버린 그런 역사도 있고요. 또 볼타(Alessandro Volta)가 전지를 간단히 만들었는데 도대체 거기에서 어떻게 전기가 흐르는지에 대한 이론적 논란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전지들이 많이 발명되 면서 어떻게 하면 더 실용적이고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많았고요. 또 전지를 발명해서 전기 회로라는 게 처음 생겼잖아요. 전지가 없을 때는 회로도 없죠. 회로가 만들어지면서 전자기학이라는 게 시작되고, 전류를 흘림으로써 전자기 효과가 발견되었죠. 전지를 발명하고 나서 20년 후의 이야깁니다. 전자기 효과를 발견하면서 또 거기에 대한 새로운 학문 이론도 생기고, 이론뿐 아니라 발전기도 생기고 모터도 생기고……. 전지 하나가 발명됨으로써 새로운 과학과 기술과 모든 것이 엄청나게 발달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 역사에 대한 책을 쓰고 있고요.
철학적으로는 제가 이러한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대개 가진 과학 지식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말하자면 실천적인 과학 지식을 이해하는 데는 부적합한 틀이 아닌가 그렇게 느꼈어요. 그 생각을 하다가 작년에 새로 출간된 책이 있죠.[1] 현재 연구의 중점은 그 두 가지입니다.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구본진: 말씀해 주신 작년에 출간된 책에 대해서도 저희가 질문을 준비했었는데요. 그 전에 방금 답변을 들으면서 궁금해진 부분이 있습니다. 『물은 H₂O인가?』에서 화학사와 화학 철학이 처음엔 낯설었다고도 하셨는데, 전지에 대한 연구로 연이어서 화학사의 사건을 다루시게 되었습니다. 화학사를 계속 다루게 되신 계기나, 화학사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있으신 건가요?
장하석: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너무 긴데. (웃음) 처음에 학부 때는 물리학을 공부했고요.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할 때도 20세기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연구했었죠. 화학을 보게 된 것은 처음에 온도계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입니다. 온도와 열을 다루는 학문은 당연히 물리학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한 200년 정도 올라가 보니까 온도와 열에 관한 것을 화학에서 다루더라고요.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의 화학 원소 표를 보면 빛과 열부터 나오지 않습니까? 열이라는 게 화학적 주제였고, 그게 신기해서 화학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들여다보니까 솔직히 말해서 물리학보다 더 재미있는 부분도 많고, 그 당시에는 물리학보다도 화학이 사람들에게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학문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 역사를 보다가 화학에 재미가 들려서 (웃음) 화학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보니까 이 화학이라는 학문이 본질적으로 좀 물리학하고 다르구나 느꼈어요. 옛날에 처음에 한국에서 학생으로 공부할 때는, 요즘도 그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중학교 때 ‘물상’이라고 배웠거든요. 이게 물리와 화학을 그냥 합쳐놓은 거였죠. 고등학교에 가서 물리, 화학이 분리가 되었는데, 요즘도 환원론자들이 화학은 그냥 물리를 응용한 거라고 생각들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화학을 보다 보니 화학만의 특이한 특성이 있더라고요.
전지를 보게 된 이유도 그렇습니다. 전지도 사실 물리학자들한테 물어보면 물리학 내용이고 화학자들한테 물어보면 화학의 내용이죠. 『물은 H₂O인가?』에서도 생각나실지 모르겠지만 제2장에 전기 분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잖아요. 거기서 얘기했던 거는 전기 분해라는 게 정말 어떻게 되는 메커니즘인가 거기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얘기를 썼는데요. 사실 그 책에 들어가지 못했던 내용이 전지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 논란은 사실 더 심하고 더 컸거든요. 그 얘기를 이전 책에는 집어넣지 못했고, 그럼 따로 써야겠다고 사실 좀 간단히 생각했었는데 들어가 보니까 또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그래서 따로 책이 됐지요. 아무튼 저도 학생 때는 화학을 좀 깔보고 재미없게 생각하고 그랬는데, 정말 들어가 볼수록 오묘하더라고요. 또 일상생활과도 쉽게 연관되어서 대중들하고 얘기할 때도 친근감을 끌어낼 수가 있고요.
구본진: 감사합니다. 이제 작년에 출간하신 철학 연구에 대해서도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Realism for Realistic People이라는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을 하다가, 좀 일상적인 용어를 써서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이런 의미로 이해했는데 적절할까요?
장하석: 그렇죠. 그게 맞습니다. 영어로 ‘Realistic’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얘기를 하려고 한 거고요. 사실 영어에서 좀 미묘하죠. 철학적으로 실재론자 아니면 실재론적인 입장을 얘기할 때는 ‘Realist’, ‘틱(-tic)’이 아니라 ‘Realist’라고 해야 더 정확하고요. ‘Realistic’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죠. “Be realistic.”이라고 하면 “야, 되는 얘기를 해라.”라든지, “되지도 않을 꿈을 키우지 말고 그냥 할 수 있는 거를 하자.” 그런 어감이 있거든요. 현실적이라고 옮기면 아주 적합할 것 같네요.
구본진: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
장하석: 책 내용을 다 얘기하기는 길고 세 가지만 감을 잡아드릴게요. 먼저 제목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과학철학에서 실재론을 보면 사실 비현실적인 주장 아닙니까? 우리가 과학을 해서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죠. 실제로 물어보면 요즘 과학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런 꿈을 꾸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진리라는 말을 남용하지 않거든요. 그냥 구체적인 연구를 하며 뭔가 좀 밝혀내겠다, 그런 거죠. 우주가 어떻게 생기고 진리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우주론 하시는 분들이 몇몇 계시지만, 보통의 과학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꿈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게 한 가지 있고요.
철학 전통의 차원에서 볼 때,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실용주의를 과학철학에 진지하게 도입하는 것입니다. 철학, 특히 분석 철학이나 분석 철학 경향의 과학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실용주의를 배격하거든요. 그건 진지한 철학이 아니라거나 실용주의로 들어가면 상대주의로 빠진다거나 그런 편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과학자들이 하는 실천(practice)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제가 볼 때 실용주의 철학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요즘 이야기하는 것보다도 고전적인 실용주의, 예컨대 제임스(William James)나 듀이(John Dewey),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같은 사람들이 했던 생각을 들여오면 실제 과학의 실천을 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런 시도를 했습니다.
한 가지 또 말하자면, 과학철학자들은 대개 과학 지식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죠.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 또 그 믿음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저는 그렇게만 과학 지식을 보는 것은 좀 좁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하는 행위에 담긴 지식은 어떤 것인가.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Knowing that”과 “Knowing how”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다’ 형태의 명제적인 지식이 있고 또 ‘뭔가를 할 줄 안다’고 할 때의 ‘안다’라는 지식이 있죠. 그 ‘할 줄 안다’는 의미, ‘행위에 담긴 지식을 더 생각해보자. 명제에 담긴 지식 역시 결국은 행위에 담긴 지식에 기반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과학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관한 궁금증
민병웅: 다음은 사실 좀 선생님의 개인적인 동기를 듣고 싶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오래전부터 ‘통합된 과사철’에 관해 목소리를 내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처음 integrated HPS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실은 여러 철학자들이나 연구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계기들이나 경향이 바뀌기도 하잖아요. 선생님께서 이런 흐름들을 계속 타당하다고 믿고 꾸준히 추구하고 계시는 이유 같은 것들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장하석: 그럼 개인적인 답변을 드려야겠네요. (웃음) 제가 처음에는 물리학을 하다가 스탠퍼드 대학에 철학 박사를 하러 갔습니다. 과학철학을 하려고 갔는데 운이 좋아서 여러 좋은 선생님들 밑에서 공부를 했죠. 그중 가장 중요했던 두 분이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 교수님과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 교수님이었습니다. 두 분 밑에서 공부를 하면서 처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과학철학과 과학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훈련이 되었고요. 그때 선생님들은 매 학기 과사철 세미나를 같이 열어서 함께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죠. 그래서 처음 시작은 그렇게 됐었고요.
더 공부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좀 부정적인 동기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과학철학에서 하는 걸 보면 이게 과학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싶은 추상적인 논의나 실제 과학 연구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거기에 대한 반감이 좀 있었죠. 한 가지 예만 들면, 제가 박사과정을 하던 시기에 시작된 추세 하나가 베이즈주의(Bayesianism)였습니다. 과학철학하는 사람들이 “이 분석틀(framework)을 가지고 모든 걸 보면 다 해결된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고요. 거기에 대한 논란도 많았죠. 그 논의가 굉장히 복잡하고 테크니컬하게 되는데 실제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더라고요. 우리가 이런 연구로 과학을 정말로 이해하는 과학철학을 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반감이 좀 생겼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정말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고자 하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짜 최첨단 과학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들어가서 보는 겁니다. 그런데 힘들죠. 그 정도의 과학을 소화하려면 정말 ‘진짜 과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힘들어요. 대신 과학사를 보게 되면 내용도 이해하기 쉽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처음에 양자역학을 가지고 연구하니까 내용 자체도 그렇고 다른 학자들과의 교류도 정말 어려웠습니다. 다른 철학자들 대부분은 양자역학 자체를 전혀 이해를 못 하니까 거기에 대한 철학적 내용을 이야기한다는 것도 시작부터가 힘들었죠. 그래서 옛날 온도계 이야기를 하니까 아주 수월하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요. 그렇게 해서 과학사를 더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제가 박사과정일 때 이미 과학사에서 굳어지기 시작한 추세가 철학적 개념을 배제하거나 과학 지식의 본질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의 내용 자체를 배제해버리고 문화사, 사회사로 들어가서, 말하자면 ‘과학자들에 대한 역사’를 쓰지 ‘과학에 대한 역사’를 쓰지 않더라고요. 거기에 대한 반감도 있었습니다. 진정한 과학사를 하려면 사회사를 하더라도 과학의 내용에 대해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과학 지식이라는 게 어떤 것인가 생각하면서 불가피하게 또 과학철학이 들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죠.
민병웅: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당시 과학철학과 과학사를 공부하면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던 점들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조금 어려운 질문이지만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었는지도 궁금해집니다. 당시 매 학기 열렸다고 한 과사철 세미나에서 두 학문을 같이 공부하면서 떠올리게 되신 건가요? 아니면 애초에 석사나 학사 때, 과학철학을 처음부터 공부할 때, 다시 말해 이 학문을 처음 마주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문제의식이었을까요? 돌이켜보셨을 때 어떠신가요?
장하석: 글쎄요. 그건 사실 굵직한 질문이고 자세히 말하자면 너무 길고요. 한 가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공부하는 스타일은 제 자신의 질문을 따라가는 스타일이거든요.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제가 알고 싶은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웃음) 사실 과학철학 자체도 그렇게 해서 시작했고요. 왜냐하면 물리학 공부하면서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물리학 교수님들이 다루지 않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맨날 뭘 물어보면 “그건 철학적인 질문이니까 생각하지 말라”는 (웃음) 답을 많이 들었습니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면서도 ‘이거 내가 알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해주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습니다.
민병웅: 요즘 저도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면서 여러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y)를 보게 되는데요. 거기서 어떤 저만의 관점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이 많고 막힐 때가 많은데, 답변해주신 말씀들을 좀 더 새겨보게 됩니다.
장하석: 그런데 사실은 제가 한 번 갤리슨 교수한테 혼났던 일이 있습니다. 박사 논문 쓰면서 열심히 써가지고 가져가면 “너는 도대체 너 혼자 사냐” 그렇게 한번 혼을 내셨어요. 왜냐면 너무 제가 알고 싶은 질문에만 중점을 두다 보니까 이제 중요한 문헌(literature)을 다루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논의를 했던 것도 그냥 무시하고 그런 경향이 있다고 꾸중을 하시더라고요.
민병웅: 그렇게 하셔서 독특하고 독창적인 뭔가를 만들어내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장하석: 처음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하면 좋은데 나중에는 포장도 해야죠. (웃음) 포장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좀 좋지 않은데, 자기의 생각 자체도 남의 생각과 비교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더 깊어지는 부분이 분명 있다는 거죠.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민병웅: 앞선 질문이 좀 개인적인 것이었다면, 이번엔 학계 전반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주로 계시는 영국이나, 좀 더 넓게는 유럽, 혹은 구미 학계 전반에서 integrated HPS 혹은 과학학 전공 간의 협력을 도모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융합적 시도나 그와 비슷한 경향들에 대해 과학학계의 어떤 동향들이 있다면 간략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장하석: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 전에 배경을 먼저 설명드리면, 특히 영어권에서는 과학사와 과학철학 사이의 융합이나 과학학 내 세부 전공 간의 협력이라는 게 정말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케임브리지를 포함해서 인디애나 대학, 피츠버그 대학 등은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가 있잖아요. 그러나 이름만 그렇지 들어가 보면 과학사 하는 사람들 이쪽, 과학철학 하는 사람들 저쪽, 이런 식으로 너무 분리가 되어버렸어요. 서로 거의 지적인 접촉이 없고 심지어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런 추세가 되어버렸죠.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융합을 추구해보자 이런 학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국제적으로 모여서 2007년이었나 그쯤에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걸 Committee for Integrated HPS라고 부르는데 이 ‘동아리’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요.[2] 융합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대략 2년에 한 번 국제학회를 열어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방법론적인 토론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과학철학 하는 사람들 중에 제가 아까 한 이야기처럼 “과학의 실태와 좀 연결되는 이야기를 해봅시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학사하고도 연결을 하지만, 현재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들과도 연결 짓고, 그것을 과학 실천을 보고자 하는 과학철학과 또 연결시키죠. 이런 걸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이 있어요. SPSP라는 곳으로 Society for Philosophy of Science in Practice의 약자입니다.[3]
웹사이트도 찾아보실 수 있는데 여기서도 2년에 한 번 학회를 엽니다. 과학학과의 천현득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나 뵙고 인사했던 것도 영국 엑시터에서 모였던 SPSP의 제3회 학회였던 것 같아요.
아무튼 SPSP 사람들이 모이면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의 융합도 시도가 되고요. 과학정책과 융합도 많이 시도되고 있고요. 이런 종류의 모임을 조직하는 움직임들이 많은데, SPSP는 굉장히 성공적입니다. 우리가 정말 과학철학의 방향 자체를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죠. 예를 들어 요즘 흔히 잘나간다고 하는 과학철학자들이 그런 쪽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헬렌 론지노(Helen Longino)라든지 여러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이 주의를 끌고 있고, 헤더 더글러스(Heather Douglas) 같은 사람들이 과학정책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있죠. 과학과 가치라는 주제로도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고 매튜 브라운(Matthew Brown) 같은 사람들이 실용주의 철학도 들여와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낸시 카트라이트도 요즘 정책하고 관련된 연구를 많이 해주시고 있고요. 이쪽으로는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반면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융합은 아직도 좀 (웃음) 고전하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답변 시작할 때 이야기한 것처럼 이건 영어권의 추세입니다. 프랑스 같은 곳에 가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융합이 안 되어서 고민이라고 하면 이해를 잘 못 해요. 불어권에서는 아직까지도 당연히 과학철학을 하려면 과학사를 보는 것으로 알고 있죠. 영어권에서 이게 분리가 되고 있다는 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현상이죠.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어권은 또 그림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독어권이 불어권 지역에 비하면 영어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또 자기들만의 전통이 있죠. 소위 말하는 대륙 철학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는 역시 과학사를 좀 더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세계적인 추세를 보면 좀 그림이 복잡하죠.
구본진: 과학과 가치처럼 과학철학이 과학사나 정책, STS 분야와도 소통할 수 있는 주제들을 언급을 해주셨는데요. 이런 학제 간 연구를 활발히 하기 위해선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장하석: 우선 제가 느끼는 것은 학제 간 연구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 힘든 일입니다. 그걸 가장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는 거라고 보거든요. 말하다 보니 생각나는데 옛날에 그 유명한 비엔나 서클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던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라는 사람이 있죠. 이 사람이 정말 학제 간 연구를 중요히 여겼고 그게 필요하다고 주장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이게 과학의 통일성이라고 잘못 이해되어서 전달되기도 했는데요. 그 사람의 주장에 중요한 것은 학제 간 연구입니다.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노이라트가 만들어낸 예가 있는데요. 산불을 꺼야 한다는 아주 구체적인 임무가 생겼을 때 우리가 그걸 과학적으로 해결해야겠죠. 그러려면 모든 과학 분야를 다 끌어들여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불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물리학이 필요하죠. 또 연소 과정을 자세히 이해하려면 화학이 필요하겠죠. 산불 같은 게 어떻게 퍼지는 것인가를 보려면 날씨를 알아야 되니까 기상학도 필요하죠. 이렇게 계속 생각해보면 모든 과학 분야가 들어갑니다. 노이라트의 주장은 여기에 사회과학도 들어가야 된다, 불을 끄려면 소방대를 조직해서 파견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사회학을 이해해야 되고 그런 조직을 유지하려면 결국 경제학도 필요하다는 거죠. 숲이라는 걸 이해하려면 생태학도 들어가야 되겠고요. 정말 빠질 수 있는 과학 분야가 없다는 겁니다. 요점은 구체적인 주제를 잡아서 이해하고, 구체적인 사태에 대처하려고 생각하다 보면 학제 간 연구나 융합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된다는 거죠.
제가 연구할 때 ‘맨날 하는 짓’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과학 지식 중에 가장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게 뭘까. 그렇게 구체적인 거를 잡아서 역사적, 철학적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물이 H₂O라는 거, 삼척동자도 다 아는 그 이야기를 집어서 철학적으로 생각했죠.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인식론의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그거를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참 대답이 안 나옵니다. 현대과학에서 이런 걸 다루지 않잖아요. 당연히 아는 거죠. 교과서를 찾아보면 물이 H₂O라고 나와만 있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건지를 알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역사를 보는 거죠. 옛날 과학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역사를 들여다보면 또 철학적인 문제가 터져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냈었는지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서로 다른 이론이 있었고, 서로 논쟁했고, 그 논쟁이 어떻게 해결됐는가.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했던 그 기준은 뭐였는가. 어? 다시 철학적인 이야기가 되었네요. 그렇게 물고 물리면서 역사와 철학이 같이 짜여 들어가는 거죠.
이게 제가 연구하는 좀 특이한 방식이고요. 일반적으로는 무엇이 되었건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잡는 겁니다. 예로 든 건 인식론적인 문제였지만 윤리적 문제가 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정치적 문제가 될 수도 있겠고요. 지금 우리가 사회적으로 다뤄야 되는 문제가 산적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문제를 하나하나 집어서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윤리와 인식론과 형이상학까지도 다 같이 물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도 물론 들어가고, 정책도 들어가고, 과학 커뮤니케이션도 들어가고, 교육도 들어가고요. 구체적인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다루다 보면 모든 학문 분야를 다 끌어들여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보거든요.
구본진: 구체적인 문제를 설정해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최근에 학계에서 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그런 구체적인 이슈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장하석: 많이 있는데요. 현재 가장 걱정들 하는 것은 기후변화 그리고 AI입니다. 한국에서 과학철학회를 하면 AI를 자주 주제로 하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AI에 관한 논의를 들어보면 다소 추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야겠죠. 과학사와 과학철학 사이 융합을 볼 때도, 생각보다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안타깝긴 한데 이것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룰 때 제일 잘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유전학을 본다던지 할 때, 후성유전학(epigenetics) 같은 걸 보면 이게 환원론에 배치되는 것인가? 그럼 그 역사는 어땠지? 이런 식으로 물려 들어가는 경우가 많고요. 지금 그런 주제들이 많이 나와 있죠. 어떤 사람들은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이라든지, 소위 빅데이터를 이용한 과학이라든지 최근에 나오는 과학의 특정 주제를 가지고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게 나올 때 좋은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고 융합이나 학제 간 연구도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민병웅: 저희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시도들을 말씀해주셔서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한국의 상황으로도 연장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한국의 학생들이 과학학 분과 간의 융합적 시도를 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장점이나 특징, 독창성 같은 것들이 있을까요?
장하석: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실 한국에 계신 분들이 만들어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제가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있는데요. 한국의 과학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연구해 주셨으면 하는 거죠. 지금 많이들 작업을 하고 있어요. 민병웅 학생도 한국에 대한 연구를 하신다고 했고, 전북대에서 추진하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 프로젝트도 굉장히 훌륭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북대에서 하시는 프로젝트에 과학철학은 잘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시도해 볼 수 있겠죠. 제가 한국사를 정말 잘 아시는 분들이 연구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한국에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졌던 과학지식, 기술지식, 의학지식 이런 것들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입니다. 우리에겐 과학이라고 하는 말 자체도 없었지만 돌이켜 볼 때 과학같이 보이는 지식과 전통은 분명히 있었죠. 그 지식의 본질은 뭐였는지, 그게 또 서양 지식이나 중국 혹은 일본의 지식과 어떻게 비교해 볼 수 있는지 그런 걸 파고 들어가면 굉장히 생각해 볼 점이 많을 것 같고요. 자연히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융합을 피할 수 없는 주제 아니겠습니까?
이런 분야를 시도하고 있는 분들이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신동원 교수님의 한국 의학 기사를 보면 이거 정말 철학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재밌겠다 생각되는 내용들이 많고요. 이화여대에 계신 이정 교수님이 하신 일제강점기의 식물학 연구 같은 것도 철학적으로 정말 흥미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연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민병웅: 언급하신 것처럼 한국사 연구자들도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시작해서 이런 고민들을 많이 해왔고 비단 한국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소위 비서구의 과학을 다루는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요. 답변해주신 내용은 이런 문제의식을 과학철학적인 질문으로……. 사실 어떻게 보면 그 질문 자체가 과학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한데요.
장하석: 그렇죠.
민병웅: 그럼에도 뭔가 좀 더 철학적으로 파고드는 작업들보다는,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과학이라는 말을 재정의하는 작업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행위자들이 만들어낸 실천들, 행위자들이 생각했던, 혹은 공부하고 실천했던 그 작업 자체들을 보면서요. 그런 점에서 좋은 말씀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과학에서 만난다
민병웅: 학제 간 연구에 대해 말씀해주신 답변을 들으며 질문 하나가 떠오르는데요. 얼마 전 참석했던 한 학회의 라운드테이블에서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 학제 간 연구라든지, 기후변화 문제 같은 복잡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사회과학 분야나 인문학 분야에서 “공동 연구, 공저 활동 같은 것을 지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가령 integrated HPS 연구에서도 혼자 이런 것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과학철학자랑 과학사학자가 협력을 한다면 독창적인 무언가가 나올 수 있다고도 생각을 하는데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긴 하겠습니다만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시나요?
장하석: 거기에 대해 제가 그리 대단한 말을 할 것은 없는데요. 일단 논문 같은 걸 같이 쓴다는 거, 공저 활동을 한다는 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협업을 하다 보면 많은 경우 모여서 토의를 하고 헤어지는데 그러면 사실 얻는 게 별로 없습니다. 의견 교환도 하고 재미있게 토론하지만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남는 게 없어요.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끝나면 어려운 질문이 나와도 ‘나중에 다시 생각하지’하고 말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뭔가를 같이 만들어내야 되는 작업을 한다면 피할 수가 없잖아요. 논문을 공저한다면 그 결과물은 하나니까 어떤 형태로건 같이 하는 사람들이 동의를 해야 하죠. 그 과정에서 좀 어려운 논의들도 토의를 많이 하게 되고요. 말하자면 피할 수 없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어떤 동의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민병웅: 답변해주신 내용에 되게 공감이 많이 되는데요. 상대적으로 인문학 분야에서 공동 연구를 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공동 연구 같은 것들이 이공계 분야에서는 되게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당연히 실험실에서 논문을 같이 쓰고 그런 경우가 자연스러운데, 인문학 연구자들은 공동 연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드문 것 같아요. 대부분 단독으로 쓰는 것이 기본적인 것 같기도 하고, 실적에서 유리하다거나 혼자 생각하고 연구하는 게 편하다거나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요. 이런 게 문제들을 다룰 때, 특히 아까 이야기하신 것처럼 요즘 다뤄지는 과학에 관한 시의성 있는 주제들을 다룰 때 한 관점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 굉장히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장하석: 예. 그렇습니다.
민병웅: 다음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어느 정도 앞에서 대답이 된 부분도 있긴 한데요. 사실 다른 과학학 학위 과정이 있는 곳들도 마찬가지지만, 서울대 과학학과에는 과학사와 과학철학, STS, 과학정책 등 여러 전공이 있습니다. 모두 메타적으로 과학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동시에 전공별 어떤 차이나 간극을 느끼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융합적인 작업들이 학제간 연구로서 과학학 전반에서 갖는 어떤 효과나 기능 같은 게 있는지, 과학학 내 서로 다른 세부 전공 사이의 조화를 위해 어떤 점을 기여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장하석: 질문에 해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 메타적으로 과학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 생각에는 그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우리가 어디서 만날 것인가, 결국 과학에서 만난다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과학학이라는 게 존재할 의미가 없잖아요. 제가 처음에 반감을 가졌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과학사도 과학을 다루지 않고 과학철학도 과학 자체를 다루지 않다고 봤으니까 둘이 연결할 이유가 없다고 느낀 거예요. 저는 처음부터 과학을 공부했던 사람이고 제가 과학사나 과학철학을 하는 이유도 결국 과학을 더 잘 이해하고 좀 더 나아가서 과학 자체를 개선하는 데 있거든요. 저 같은 사람이 보는 과학사, 과학철학, STS, 과학정책, 이 과학학 모두가 과학에 대한 거거든요. 그걸 염두에 둔다면 학제 간 연구나 융합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언제 한 번 미국 History of Science Society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막 논란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라고, 그렇게 하면 우리가 과학에 종속되고 끌려다니는 학문밖에 안 된다고 하고요. 재미있는 논쟁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느끼는 것은 그렇습니다. 과학하고 연결하지 않으려면 그냥 역사학하고 철학하고, 사회학, 인류학 하면 되지 왜 그걸 과학학이라고 얘기할 필요가 있겠어요. 물론 일반 역사학에서도 과학이나 기술, 의학 등을 사회적 현상으로서 다루어야 하고, 정책하는 분들도 요즘 일반 정책한다고 해서 과학 기술을 제쳐놓고 어떻게 정책을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학문이 과학학이죠. 그러나 우리가 학과를 따로 만들어서까지 과학학을 한다는 것은 과학의 본질과 그 내용과 중요성을 다각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우리는 과학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민병웅: 선생님께서 2014년 논문 등에서 ‘실천적 전회(Practice Turn)’도 강조하셨는데요. 과학자들의 ‘행동’을 중심으로 과학 활동을 분석하는 틀을 제안하신 건데 이런 관점이 앞서 말씀하신 STS 등 다른 분과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STS적인 문제의식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거든요. 사실 고전적으로 STS가 해오던 작업에 대해 인류학적인 접근법 등을 사용해서 실험실의 블랙박싱을 푼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요. 이런 것들을 좀 더 철학적인 관점과 연결을 하려고 하시는 작업으로 이해를 하면 될까요?
장하석: 네 그렇습니다. 실천적 전회가 ‘과학을 다룬다면 실제 과학을 다루자’라는 거예요. 이렇게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과학의 이미지를 다루지 말고 진짜 과학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진짜 과학 지식이라는 게 어떻게 사회적으로 응용되고 어떤 중요성과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자는 거죠.
과학자 그리고 과학도를 청중으로
민병웅: 다음 질문은 청중(audience)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과학학과 내에 여러 전공들이 있는데 전공에 따라 친연성이 있는 경우도 있고 간극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 진단하는 여러 과학사학자들이 Isis 등을 통해서 여러 차례 논쟁을 펼치기도 했고요. 제가 생각할 때 이런 논쟁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은 ‘누가 청중인가’인 것 같습니다. 누가 청중이고 또 독자인가, 과학학이라는 것을 하는 연구자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책을 쓰고 연구를 진행하고 출간을 해야 하는가 같은 문제들입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integrated HPS 같은 경우는 당연하게도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를 포괄하는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계실 것 같은데요. 그 외에도 더 목표로 하고 계시는 독자층이 있는지, 또 integrated HPS 작업 자체가 과학학 분야의 전반적인 독자층을 넓히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고 계신 것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장하석: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금 말씀하셨지만 당연히 우리 전문가들이 보는 거죠. 그러나 그걸 넘어서 생각해 보면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과학자들과 과학도들입니다. 근래의 추세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우리 과학학 하는 사람들이 과학자들을 청중으로서 버렸거든요. “우리는 과학자들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과학자들)은 자기들 하는 거 하는 거다. 우리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넓게 보면 사회의 일반 사람들에게, 또 그 이전에 일반 철학자들, 사학자들, 사회과학자들에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한데요. 그러나 우리가 과학학을 하면서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이건 실패하는 거죠.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과학자들이 보기에 소용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좀 처량한 거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문학 비평하는 사람들이 “우리는 작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없어.” 그런 거나 비슷한 이야기 아니겠어요. 미술사를 하는데 예술가들이 볼 때 이해도 안 되고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건 슬픈 일이죠. 제가 생각하는 것은 과학자들이 봐도 “일리가 있구나. 우리가 그런 생각을 못 했었네.”하는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그런 과학학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과학자들과 과학도라고 말씀드렸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과학도는 과학자를 청중으로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과학학의 내용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니까 과학이 뭔지, 왜 중요한지 더 잘 알겠어. 과학이 재밌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거죠. 과학도라고 이야기했지만 솔직히 온 국민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과학이 의무교육으로 들어가 있잖아요. 다른 나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전부 과학도죠. 하기 싫지만 강제로 과학도가 된 경험이 다들 있습니다. (웃음)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와닿게 해주면 다들 호응합니다. 교육방송 강연을 하면서 깨달았던 게 그거예요. 정말 과학하고 상관없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재밌다, 느끼는 게 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더라고요. 물론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나한테 이야기를 안 하니까 모르지만. (웃음) 꼭 과학자나 과학을 많이 아는 사람들만이 호응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가 꾸준히 추진해 왔고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도 과학사와 과학철학하고 과학 교육을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한국에서 특히 과학 교육계에 있는 분들이 특히 호응을 많이 해주시고 있어요. 그 분야의 작업이 앞으로 많이 해보고 싶은 내용이에요.
민병웅: 과학 교육에 관한 부분을 말씀해 주시니까 또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예전에 제가 학부 때 한국과학사학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백성혜 교수님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들이 과학 교육, 교과서와 교과서 속 실험 같은 것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과학사학회에 발표를 하시더라고요. 그때 선생님께서 공동 발표자로 이름을 올리신 게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선생님께서 이런 교육 문제도 연구를 하시는구나, 대중들과 소통하는 것을 되게 중요시 여기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무래도 교육방송을 통해 강연하신 것도 그렇고, 국내에 번역되거나 한국어로 쓰신 책 같은 것들도 봐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상욱 선생님께서도 서평을 통해 장하석 선생님께서 이전에 쓰신 책(『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이 단순히 과학철학 개론서나 입문서가 아니고 선생님의 과학에 대한 이해를 제시한 책이라고 쓰신 적이 있는데, 지금 답변해주신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장하석: 네, 맞습니다.
민병웅: 시간이 이제 거의 다 됐긴 했는데요. 간략한 추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과학자와 과학도, 두 가지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과학도들을 위해서 과학 교육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면, 과학자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가지 꼽는다면 뭐가 있을까요? 사실 과학학 연구자들이 과학자들을 독자로서 버렸다는 말씀도 해주셨는데요. 과학 하는 사람들이 과학학에 대해 갖는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요. 소위 말하는 신화화된 과학을 깨부수고 재정립하는 작업들을 하다 보니 일종의 반작용으로 ‘과학 전쟁’ 같은 논쟁들도 있었고요. 저희는 그 이후 세대로 공부를 하는 건데 여전히 그런 것 같거든요. 지금도 학부생들이나 지도교수님과 함께 여러 프로젝트 같은 것을 해보면 만나게 되는 과학도들이 과학학의 관점들에 대해서 갖는 거부감이 되게 크고요.
장하석: 그렇죠.
민병웅: 그게 오히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윤리적인 문제나 인문학적인 문제들이 자꾸 ‘들이대는’ 것처럼 느껴지나 봐요. 그런 거부감이 확실히 큰 것 같은데, 저도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좀 궁금합니다.
장하석: 그건 정말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인 것 같아요. 질문하신 것처럼 과학학 하는 분들이 신화적인 과학의 이미지를 깨기 위해서 비판적인 작업을 하다 보니까 오해받게 된 게 과학학하는 놈들은 과학을 적으로 여긴다는 이미지가 박혀버린 거예요. 실제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웃음) 몇몇 과학학 분야에서 정말 과학을 혐오하고 과학 때문에 사회가 망쳐졌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는 한데, 대부분은 안 그렇잖아요. 아니, 우리 과학학 하는 사람들이 백신을 안 맞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과학을 절대 싫어하지도 않고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이미지를 주고 있다는 게 문제인데 과학학적으로 과학을 비판하고 과학 지식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것이 과학을 적으로 여겨서가 아니라는 거를 잘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과학학 하는 사람들에 따라서도 다르죠. 저 같은 사람은 과학을 정말 사랑합니다. 과학이 정말 재미있고 과학이 더 잘했으면 좋겠고. 그런 마음에서 응원도 하고 비판도 하고 그런 거죠. 그런데 이제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죠. 과학학 하면서 과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말 취미가 없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이렇게 섞여 있는 것 자체는 건전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과학자들을 우리가 청중으로 갖고자 한다면 두 가지 의미가 있겠죠. 하나는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론 자체를 실제 과학 하는 분들하고 함께 이야기해보자, 그런 의미가 있고요.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과학에 대해 정말 관심과 기본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과학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이니까 이런 사회적 차원을 과학 하는 분들도 생각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청중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거는 과학학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이죠. 이런 것들은 과학자들에게 이해를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작업의 목적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야죠. 그걸 설명을 안 해주고 비판적인 이야기를 들어가면 거부 반응을 할 수밖에 없겠죠.
민병웅: 말씀하신 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사실 학과 내의 교수님들은 과학 분야에 계신 분들과 협력도 하고 소통도 하시는 경우가 확실히 많은 것 같은데, 저 같은 경우는 공부를 하면서도 그런 노력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공부하려고 하는 화장품 산업 같은 경우에 연구자들이나 종사자들, 실험실에서 일하는 학생들 이런 사람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지 않고 연구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런 게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장하석: 네. 사실 과학자라고 해서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사람들이고 천재들이고 그런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좀 막말로 하자면 과학자들은 실무자들이거든요. 우리가 실무자에 대한 존중을 해줘야 하는 그런 점이 있죠. 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 평가를 하고 논평을 하는데 정말 그 일을 하는 실무자의 얘기를 듣지 않고 무시해버릴 수는 없잖아요. 지금 바로 교류를 하기를 원한다면 동료 학생들을 상대로 시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꼭 유명한 사람을 찾아간다거나 그런 것보다도 같은 단계에서 공부하는 이공계 친구들한테 시도를 해보는 거죠.
구본진: 연관된 질문이라 하나 더 여쭤보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가 청중으로 과학학 내의 학계를 상대로 할 때도 있고,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또 앞서 과학도, 좀 더 확장해보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소통해야 할 필요도 강조해 주셨습니다. 대중을 대상으로 소통할 때는 학계에서와는 또 다른 전략이나 표현법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는 대중 강연도 하시고 대중서를 쓰시기도 하고 언론사에 오피니언 글들도 종종 연재를 하시면서 느낀 부분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저희 연구자들이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혹은 개인적으로 염두에 두시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장하석: 제가 대중과 소통하는데 대단한 전문가는 아니라 특별히 말씀드릴 건 없는데요…….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그거죠. 첫째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게 당연한 말이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용어 하나하나 쓸 때마다 항상 걱정을 해야 하고요. 또 하나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에게 뭔가 와닿는 게 있을까 고민합니다. 아무리 내가 막 ‘이거 중요해’ 하고 이야기해봐야 사람들에게 와닿지 않을 수 있잖아요. 이 와닿는다는 게 참 재미있는 표현이기도 한데요. 굉장히 한국적인 표현이죠. 와닿는다는 걸 영어로 하려면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Grab somebody’. 그러니까 ‘사람들이 끌리는 게 있을까.’ 어떤 글을 쓴다고 할 때 사람을 처음부터 잡아서 끄는 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정말 힘듭니다. 청중이나 독자가 처음에 딱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작업이 쉽습니다. 차근차근 설명하고 하고 싶은 주장 하면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신문에 칼럼을 쓴다고 할 때 두꺼운 신문을 사람들이 보다가 ‘어? 읽어보고 싶다’하는 느낌이 들도록 해줘야 하거든요. 그게 힘든 거죠. 그걸 고민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없는데 쓸 때마다 고민하는 거죠. 어떻게 말을 풀어나가면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을까. 이건 사실 학술적 논문을 쓸 때도 정말 중요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많은 논문들 속에서 독자가 내 것을 읽어보고 싶어 하도록 만들어야죠. 이건 제목을 정할 때부터가 중요하고, 초록(abstract)을 쓸 때도 중요하고, 특히 어떤 글의 개요 부분을 쓸 때 읽어보고 싶게 써야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주제 자체가 중요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생각할, 항상 염두에 두고 있을 만한 서두를 던져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힘든 거죠. 청중을 잘 아는 상태라면 그게 쉬운데 대중을 대상으로 신문에 글을 쓴다든지 할 때는 독자들이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저는 외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신문 칼럼 같은 걸 쓸 때는 한국 신문을 들어가서 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다 볼 수 있으니까 도대체 요즘 논점이 되고 있는 뉴스가 뭔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교류하는지 느낌을 알아보고 싶은 거죠. 쉬운 일은 아닌데 그런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해보고 싶은 연구를 합시다
민병웅: 오랜 시간 좋은 이야기들 많이 해주셨는데요. 끝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과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학과의 후배 연구자들이나, 혹은 일반적으로 젊은 연구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장하석: 그게 제일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짤막하게 두 가지 정도 말씀드리자면요. 하나는 자기가 정말 알고 싶고, 흥미가 있고, 정말 해보고 싶은 연구에 중점을 두시라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학문을 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자기가 정말 미치도록 공부해보고 싶다, 계속 연구하고 싶다, 그런 주제의 그런 내용과 학문이 아니라면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남들이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도 필요하죠. 취직도 해야 하고요.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그걸 왜 합니까? 정말 자기가 미치도록 하고 싶지 않다면 학문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세상에 다른 필요한 과업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다들 재주도 있는 사람들이 그런 일 하면서 더 편하게 살고 돈도 벌고 그러면 되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죠.
그건 일반적인 이야기고요. 과학학을 연구한다고 할 때 항상 염두에 둬줬으면 하는 것도 있죠. 과학이 왜 중요한지 그걸 항상 생각해줬으면 하는 거예요.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죠. (첫째는) 나에게 왜 과학이라는 것이 중요한가, 내가 온갖 많은 학문 중에 왜 이런 이상한 과학학이라는 거를 하고 있는가입니다. 과학이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과학학 할 필요 없는 거죠. 또 한 가지 차원은 사회적으로 과학이 가지는 중요성이에요. 이 중요성을 그저 과학을 해야 기술이 발달 되고 나라가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넘어서 과학이라는 게 뭔데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그 자체를 주제로 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러나 그 자체를 연구하지 않더라도, 어떤 과학학 주제를 연구하든 간에 왜 과학이라는 것이 사회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항상 염두에 두어줬으면 하는 겁니다.
민병웅: 이게 공부하다 보면 되게 잊기 쉬운 질문인데요. 이런 것들을 제가 좋아하는 공부를 할 때나 구체적인 연구 질문을 떠올릴 때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하석: 그렇죠. 전문적 공부를 하다 보면 항상 큰 그림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걸 염두에 둬줬으면 하는 거죠.
민병웅: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본진 씨는 더 여쭤보고 싶거나 드릴 말씀이 있을까요?
구본진: 네. 저는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보여줬던 장하석 선생님의 교육방송 강연 시리즈를 보면서 과학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과학철학을 공부해 오면서도 실천적인 연구, 과학자들의 실천에 주목하는 연구에 관심이 있어서 선생님 책이나 연구도 흥미롭게 보았는데요. 오늘 또 직접 인터뷰를 하고 선생님께 좋은 말씀 많이 들어서 개인적으로도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장하석: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고맙습니다. 저도 오늘 아주 좋은 시간이었고요.
민병웅: 저희가 선생님 말씀을 정말 재밌게 들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시계를 지금 봤는데 시간이 되게 많이 지났네요. 무척 재밌고 유익한 이야기 들려주셨어요. 오늘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날을 기약하겠습니다.
장하석: 네. 저널도 잘 완성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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