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사이: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저널 제3호(2026.06.)

'사이'는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들이 만드는 학생저널입니다.  제3호 PDF 다운로드 특집: 감각과 상상 그림의 인지심리학과 관찰의 이론적재성 강규태 가속기 감각하기 : 현장연구자의 민족지 연구 방법론에 대하여 김연화 기술은 어떻게 우리를 늙게 하는가? : '기술적 노화'와 돌봄의 STS 심은섭 케플러의 『꿈』, 달에 관한 광학 이론과 상상 장신혜 서평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 박윤지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 김은성, 『감각과 사물: 한국 사회를 읽는 새로운 코드』 손하늘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안유진 대학원생 이모저모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 강정섭 낯선 캠퍼스에서 새로운 공부와 익숙해지기 오수환 헌 신입생의 수기 이준영 2025 APPSA TAIWAN 경험기 이형석 첫 학술 발표, 설레었던 데뷔 무대 : 2025 APPSA 참여 후기 정원호 '왜' 이후의 질문을 기다리며 : 과학학과 연극반 블랙박스 제1회 공연 <학술원 보고> 연출 후기 공일환 SF 단편 <미확인> 구본진 부록 학과 소식 편집 후기
최근 글

SF 단편소설: 미확인(구본진)

대학원생 이모저모: SF 단편소설 미확인 구본진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koobon1998@snu.ac.kr 신림동 원룸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이상한 일이 무엇일까? 모르긴 해도, 그날 내가 목격한 장면이 꼽히지 않을까. 취객들의 싸움이나 밤새 꺼지지 않는 고시원의 불빛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예전엔 서울 시내에 동물원에서 탈출한 코끼리나 얼룩말, 곰 같은 게 돌아다닌 적도 있다는데, 어림도 없다. 내가 본 건 그런 일보다 훨씬 더 설명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자, 검은색 도미노 조각을 생각해 보라. 어떤 무늬도 없이 검고, 유리처럼 반질반질한 … 몇십 미터짜리 검은색 도미노 조각. 나중에 알기를, 어떤 기자는 그 생김새를 ‘검은빛 63빌딩’이라고 묘사했다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게 당신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렇다. 미확인 비행물체. 흔히들 말하는 UFO. 바로 그 UFO가 대한민국 서울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위에. - 상담 시작해도 괜찮으실까요? - 네. - 여러 번 이야기하셨겠지만, 한 번만 더 들어볼게요. 그날 어떤 일이 있었다고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 그날 하루는 정말 특별할 것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난 돈 없는 연극배우였고, 언제나처럼 공연 연습을 위해 극단으로 출근했으며, 언제나처럼 연출 형이랑 ‘니 연기가 좋으니 마니’, ‘니 해석이 옳니 틀렸니’, 해가 저물 때까지 서로 물어뜯었다. 언제나처럼 소주 한 병에 새우깡 한 봉을 안주 삼아서. 그래서 처음엔 내가 술에 취해서 헛것을 보나, 생각했다. 이상하다.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형 말에 너무 흥분해서 그런가. 아니,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노인 배역이라지만 내가 아직 20대인데 ‘노인 같지 않다’라느니, ‘노인 연기하는 티가 난다’라느니. 그래서 따져 물었다. 내가 노인이 안 되어 봤는데 어떻게 노인...

소모임 활동기: ‘왜’ 이후의 질문을 기다리며: 과학학과 연극반 블랙박스 제1회 공연 <학술원 보고> 연출 후기(공일환)

대학원생 이모저모: 소모임 활동기 ‘왜’ 이후의 질문을 기다리며: 과학학과 연극반 블랙박스 제1회 공연 연출 후기 공일환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olbers@snu.ac.kr 과학학과 연극반 블랙박스가 2024년 8월 22-3일 서울대학교 28동 103호 강의실에서 연극 를 올렸다. 대체 왜? 내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아무리 대학원생이라지만 방학까지 책만 읽고 싶지는 않았다. 삶은 틈새가 하나쯤 있어야 살만하다.(이건 결론이 아니라 전제다.) 그래서 나는 그 방학에 무엇이건 읽기와 쓰기가 아닌 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그래도 연극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았건만. 종강이 가까운 그날 밤 하필 학과 종강 모임에 오래 남아 있었다. 하필 와인이 많이 남아서 잔뜩 섞어 마셨다. 하필 내 앞에 명배우 구본진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학부 시절을 바친 연극 동아리 이야기를 했다. 연극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하자고 해 버렸다. 연극을 또. 하필. 내가 아는 한 연극은 인간의 활동 중 가장 비효율적이고 반자본적이다. 우선 연극은 돈을 내고 시작한다. 감사하게도 이곳저곳에서 후원을 받지만 공연 제작비를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금액이 없을뿐더러, 뭘 남겨서 해먹을 생각도 없다. 남는 게 없는데 열댓 명이 모여서 뭘 자꾸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든다. 결국 부수고 깔끔하게 치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없애기 위해 우리는 일을 한다. 배우는 아마도 살면서 가장 많은 양의 텍스트를 실수 없이 외우기 위해 매일의 샤워 시간까지 알뜰하게 짜낸다. 연출은 아무래도 좋을 지시를 하면서 이 프로젝트가 순항하는 양 행세한다. 스탭들은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을 위해 쿠팡 배달비와 당근마켓 용달비를 저울질한다. 우리는 노션에서 물품 구매 결재 라인을 구축하고 매주 줌에 모여서 진척을 공유했으며 무슨 무역회사처럼 다 끝나고 ‘소래포구’에서 회식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뭘 남긴 게 없다. 두 달 준비한 공연의 60분이 지나고 나면 세상...

학회견문록: 첫 학술 발표, 설레었던 데뷔 무대: 2025 APPSA 참여 후기(정원호)

대학원생 이모저모: 학회견문록 첫 학술 발표, 설레었던 데뷔 무대: 2025 APPSA 참여 후기 정원호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ideaspace@snu.ac.kr 박사를 수료하고 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학술대회에서 발표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PSA around world 2023, 지난 APPSA, 심지어 매년 열리는 과학철학회 학술대회까지 기회가 참 많았다. 이렇게 많은 기회에도 왜 나는 발표를 하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남들에게 내놓을 만한 떳떳한 성과물일까?’라는 질문이 늘 결정을 미루게 했던 요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번 APPSA에서 첫 발표를 하게 되었다. 대단한 생각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허원기 박사님의 권유가 매우 큰 동인이었는데, “저번 대만 APPSA가 음식이 매우 맛있었는데, 이번 대만 APPSA도 음식이 맛있지 않겠나?”라는 논증 때문이었다(실제로 음식은 매우 맛있긴 했다). 그리고 학회 겸 여행도 즐겨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물론 그때도 내 성과물이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영어에 자신이 있지도 않았기에, APPSA 발표를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 있었다. 그럼에도 막연한 희망은 있었는데, 마침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업체에서 기약 없이 쉬고 있던 탓에, 계획에 없던 시간이 굉장히 많이 생겼는데, 그 시간 동안 매일 스터디카페에 다니면서 아이디어를 다듬어 나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APPSA가 좋은 배수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500 단어도 되지 않는 APPSA 초록을 작성하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는데, 그것은 영어 문장 작성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APPSA의 초록 제출 기한은 나의 주된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APPSA에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상 아이디어 ...

학회견문록: 2025 APPSA Taiwan 경험기(이형석)

대학원생 이모저모: 학회견문록 2025 APPSA Taiwan 경험기 이형석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hyungdralisk@snu.ac.kr 1. 학회는 어떻게든 끝이 난다 발표자로 선정된 후 주어진 4개월이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 여유가 많은 만큼 세워 둔 계획에서도 후퇴할 여지가 많았고, 관성이 붙은 후퇴는 끝을 몰랐다. 어영부영 끝내기는 했지만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후회가 크다. 해외 학회와 국내 학회는 또 다르다. 오래 준비하는 만큼 나태해지기 쉬우니 중간에 두 번 이상 계획을 수정하지 말자. 발표는 엉망이었다. 내용을 떠나서 전달이 되지 않았다. 준비한 원고를 읽어서는 청중들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한다. 발표를 끝낸 후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청중들의 공감과 이해를 얻지 못한 채로 나 혼자 급발진한 셈이었다. 학회 참가자들은 생산적인 코멘트를 해주려는 의지가 충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조언을 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발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발표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미 출판한 연구를 소개하는 발표였다. 주로 교수님들이 이런 발표를 했으며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다음은 진행 중인 연구의 배경과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발표였다. 가장 많은 경우였으며 질문과 조언, 그리고 답변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듣고도 잘 모르겠는 발표가 있었다. 해당 분야에 관한 내 배경지식이 부족해서이기도 하고 발표의 구성이 뇌리에 확 남지 않는 경우가 그러했다. 내용뿐만 아니라 발표 기술까지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었다는 면에서 모든 발표가 유익했다. 2. 교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다.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안면을 텄으니 다음에 다시 보면 조금 더 친해지면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음 날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소개받고 각자의 관심사, 배경,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영어는 문제...

신입생 적응 수기: 헌 신입생의 수기(이준영)

대학원생 이모저모: 신입생 적응 수기 헌 신입생의 수기 이준영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bestday95@snu.ac.kr 과학학과 학생 저널 《사이》의 구본진 편집장으로부터 신입생의 수기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신입생이었다’라는 의식을 되살려야만 했다. 기고를 제안받았던 시점에는 ‘커먼룸’이라 불리는 학생 공용 공간에서 강의를 같이 듣는 학우들과 다음 주 수업을 위한 대략 200여 쪽의 읽기 자료를 인쇄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이번 주차 읽기는 예전에 봤던 거라 조금 빨리 읽겠네’, ‘다음 주 발제여서 꼼꼼하게 읽어야겠네’하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논문들에서 나오는 매캐한 잉크 냄새가 익숙해지는 시간이 1년이 채 안 걸렸다. 대학원 석사 과정의 1년은 야속하게도 중간 지점을 넘기는 시점이다. 석사 논문 프로포절을 갓 통과하고 이렇다 할 연구도 하지 못한 채 수업만 겨우 따라간다 해도, 벌써 어엿한 후배가 두 학기째 들어오고 있다. 이들에게 과학학 연구자의 길을 친절하고 풍부하게 안내해 주실 학과의 교수님들과 선배님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2025년 봄학기 과학학과 입학 이후 1년의 시간이 어떠했는지를, 신입생 시절이 벌써 아득한 헌 신입생이 자대 배치도 받기 전인 훈련소 5주 차 선배의 마음으로 이 수기를 쓴다. 산을 오를 때 전문 산악인의 조언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위안이 되는 것은 바로 직전에 올라갔던 사람에게 듣는 “얼마 안 남았어요” 아닐까. 당장 저번 학기에 어떤 주제에 대해서 발제하고 토론했는지 기말 보고서를 어떻게 썼는지는 새카맣게 잊어버렸어도, 나의 지난 학기들이 과학학과에 처음 발을 딛고 낯설어하는 나에게 남긴 노하우나 꼼수는 분명히 있다. 과학학과에서의 첫 학기는 방대한 양의 읽기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토론 형식의 수업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강의 위주의 수업이 아니라는 것은 둘째 치고, 수업 시간에 나에게 주어지는 발언권의 분...

신입생 적응 수기: 낯선 캠퍼스에서 새로운 공부와 익숙해지기(오수환)

대학원생 이모저모: 신입생 적응 수기 낯선 캠퍼스에서 새로운 공부와 익숙해지기 오수환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tnghks272@snu.ac.kr 어느덧 나도 2학기 차가 되었다. 1학기 때를 되돌아보면, 여느 대학원 선배들이 말했듯 정신없던 나날이었던 것 같다. 딱히 특별하게 무언가를 한 것은 없는데, 엄청 바쁘고 여유가 없는 그런 하루. 나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세 가지 이유 정도를 꼽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첫 번째로는 학교의 새로움이다. 나는 학부를 다른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서울대에서의 삶이 무엇보다 새롭고 낯설었다. 이 처음 겪어보는 규모(?)의 캠퍼스, 서울대입구역과 서울대 사이의 비상식적인 거리, 교내에 산적해 있는 꽤 많은 식당과 카페들 등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새롭고 신선해서, 마치 서울에 처음 올라와 본 사람처럼 고개가 휙휙 돌아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특히 놀라웠던 것은, 학교의 지원이다. 서울대에서 학교를 쭉 다녀본 사람은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서울대만큼 국내에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과 복지혜택을 제공해 주는 대학교는 몇 없는 것 같다. 이 부분은 명시적으로 지원되는 장학이나 지원금 외에도,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암묵지로 체감이 된다. 무료 심리 상담 세션, 교내 학생들 대상으로 실시되는 다양한 비교과 프로그램, 학생들의 활동을 장려하는 프로그램과 지원금들, 학교에서 열리는 다양한 특강과 음악, 미술 전시회 등등. 학교 안에 정말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들(?)이 조성되어 있다. 체육관부터 박물관과 미술관까지, 외부인이었던 나한테 서울대는 정말 잘 짜인 하나의 마을 같았다. 두 번째는 집에서의 통학이다. 지금에야 기숙사에 살고 있지만, 2학기에 입학했던 나는 바보 같게도 기숙사 신청 기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추가 신청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추가 신청도 열리지 않게 됨으로써 학교 통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 집은 고양시 덕양구로서, 행신역 근처...

신입생 적응 수기: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강정섭)

대학원생 이모저모: 신입생 적응 수기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 강정섭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page1991@snu.ac.kr 리처드: (무에게, 허공에 대고) 비겁하도다! 내 삶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나는 이 노름판의 물주가 된 것이다……. 나는 오늘 땅 위에서 여섯 명의 리치먼드를 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그중에 다섯을 죽였는데도 여전히 한 놈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말을 가져와라! 말을! 내 왕국을 위해 말을! 끝? - 카르멜로 베네, 「리처드 3세」의 마지막 장면 [1]   … 출구를 통해 나아간 세계는 고요하지 않다. 탈출이란 텅 빈 공중으로 떠올라 혼자되는 것이 아니라, 출구의 안팎을 감싸 안은 세계 속의 수많은 존재와, 새롭게 알게 될 혹은 이미 알고 있던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다시 그러나 다르게 뒤섞이는 일이다. 탈출하는 존재는 소란스러운 세계를 휘젓는 또 다른 소란스러움이 되어 세계와 함께, 세계를 향해 휘말린다. - 강정섭, 연극 〈묵티〉 내부 세미나 발제문 中 [2]   다시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연극 비평을 쓰다가 참고하고 싶은 책이 있어서 도서관을 뒤졌는데, 구립 도서관에 책이 없었다. 도서 구매 신청을 하고 기다리기에는 한시가 급했다. 대학 도서관에 가야 했는데, 그즈음의 나는 학교라면 끔찍하게만 느껴져서 친구들을 만나고 카페에 앉아 공부하러 하루가 멀다고 학교 앞 대학가를 지나다니면서도 정작 학교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때로 정히 학교 도서관 소장 도서가 필요하면 아직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책을 빌려다 읽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는 그 친구들도 당장 책을 빌려다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내가 직접 가야 할 텐데, 학교 도서관에 간다는 것이 정말이지 영 내키지 않았다. 혹시 모르는 마음에 동문회원 신청을 해서 도서관 이용 자...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안유진)

서평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안유진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ayujin@snu.ac.kr 왜 과학은 느려져야 할까? 사람들은 과학이 삶을 더 살기 좋게 해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고 있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기후 위기를 불러일으키거나 기업의 이윤 극대화에 쓰이는 등 삶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현재의 과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른 과학을 통해 공존과 공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벨기에의 과학철학자인 이자벨 스탱게르스(Isabelle Stengers)가 쓴 책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은 하나의 유일한 과학(Science)이 아니라 다원적인 과학(science)를 추구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2013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쓰였고, 2025년에 한국어로 출간된 판본은 2018년에 출간된 영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1]   과학은 위험에 마주해 있다. 단일한 기준을 내세우고 객관성을 강조한 ‘빠른 과학’은 과학적 연구의 신뢰성을 훼손하려 드는 소문, 음모론, 불리한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반론에 공격받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국가와 과학자들은 대중을 유아적으로 보고 그들이 ‘과학을 이해해야 한다’라거나 ‘과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라고 주장해 왔다. 반면 스탱게르스는 과학을 평가하고 과학과 세상의 연결성을 논의하고 과학자들에게 그 답을 요구하는 ‘감식가(connoisseurs)’를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느린 과학을 위해서는 과학자와 대중 모두가 변화하여야 한다. 느린 과학은 단순히 ‘느려짐’이 목적이 아니다. 피실험 행위자의 반항, 평가 방식에 대한 저항, 과학자 자신의 주저함 등 여러 마찰이 만들어 내는 ‘느림’이다. 마찬가지로 빠른 과학도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빠른 과학은 과학자들에게 속도를 늦추지 말기를 명령하고, 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할 시에는 생존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빠른 과학에 익...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김은성, 『감각과 사물』(손하늘)

서평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김은성, 『감각과 사물』 손하늘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jamiesohn@snu.ac.kr 사회과학자는 무엇을 목표해야 하는가? 사회 현상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기술해야 하는가, 아니면 올바른 해결책을 제안해야 하는가? 혹은 사회 현상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제작해야 하는가? 김은성 선생님께서는 몇 년 전 “무릇 사회학자라면 첫 번째를 정답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나는 의아했다. 사회 현상을 기술하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어떻게 사회 현상을 그려내는 것만으로 세상의 문제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감각과 사물』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는 제목을 충실히 따라 도덕과 시민권(1부), 에너지 전환(2부), 정치와 경제(3부)과 관련된 논의를 ‘감각과 사물’의 렌즈를 통해 읽어 내려간다. 저자들은 또한 여러 가내 활동들을 재해석하면서 이전까지 지식 생산자로 주목받지 못했거나 남성 석학들의 보조자 정도의 위치로만 해석되어왔던 여성들의 활동을 주목하기도 한다. 제1대 보퍼트 공작부인 메리 서머싯(Mary Somerset)의 지위와 활동을 정원사 혹은 수집가의 정원 활동(gardening)에서 식물학자의 진지한 식물 탐구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줄리 데이비스(Julie Davies)의 연구나, 식물학자인 헨데리나 스콧(Henderina Scott)과 물리학자인 허사 에어턴(Hertha Ayrton)을 그들이 속했던 비공식적 네트워크 안에 위치시키고 그들의 홈메이드 과학의 아마추어성에 어떻게 당대의 젠더 인식이 개입하고 있는지 분석하는 클레어 존스(Claire G. Jones)의 연구는 여성들의 연구와 여성 실행자(practitioner) 자체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공적이거나 사적인 네트워크 사이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위치를 확보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했는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집 안의 다양한 장소와 가족들을 호명하는 글들은 자칫 전체적인 구...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박윤지)

서평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 박윤지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flask42@snu.ac.kr 근대과학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가? 과학사 초기의 많은 연구들은 실험실이나 학회, 여행이나 상행처럼 대외적 교류가 일어나는 전문적이고 제도적인 영역에 주목했다. 그러나 과학은 정말로 공적이기만 한 것인가? 혹은 과학 지식은 공적인 장소들에서만 생산되었나? 지식이 생산된 장소는 과학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가? 그렇다면 공적인 장소가 아닌 곳에는 어떤 이들이 있었나? ‘공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던 곳에서의 과학 활동이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지식을 생산했는가?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Domesticity in the Making of Modern Science)』의 저자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과학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로 공적인 영역들보다는 가내 영역, 가정, 친족과 같은 ‘가내(domestic)’를 주목할 것을 이야기한다. 과학사학자 스티븐 셰이핀(Steven Shapin)이 ‘17세기 영국의 실험의 집(The House of Experiment in Seventeenth-Century England)’에서 신사들의 사택을 주목했던 것을 넘어, 저자들은 집 안의 다양한 공간들에서 어떤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이 활동들이 어떤 식으로 다시 가외의 장소들과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있다. [1]   저자들의 연구는 단순히 그동안 간과되었던 ‘가내’의 중요성을 발굴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며 계속해서 공과 사, 가정과 일의 이분법을 흔들고 그 구분 자체를 유연하고 투과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린다. 이자벨 레모농(Isabelle Lémonon)과 로랑 다메쟁(Laurent Damesin)의 「계몽과학에서 젠더와 공간 – 마담 뒤피에리의 과학 작업과 네트워크(Gender and Space in Enlightenment Science: Madame Dupiéry’s Scientific Wo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