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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신체적 실천으로서 과학: 라투르와 신유물론 (구재령)

특집: 과학이란 무엇인가?


물질적・신체적 실천으로서 과학
: 라투르와 신유물론


구재령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bravenewworld@snu.ac.kr


과학이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과학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보편적인’, ‘진리’, ‘법칙’ 같은 웅장한 용어들로 압도하는 이 정의는 과학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반영한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자연에 내재하는 진실을 찾아내고 축적하는 것이며, 어느 수준에 이르면 기본 법칙에 의거하여 일군의 자연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과학은 자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점점 근접해진다. 그에 반해 STS에서는 과학을 ‘진리 탐구’로 여기지 않는다. 한 발짝 떨어져 자연세계를 중립적인 눈으로 관찰하는 정신적인 존재는 설 자리가 없다. STS의 관점에서, 과학은 고유한 관행, 구조, 의제, 역사가 있는 사회적 제도이며 시대와 문화와 함께 늘 변동하는 상태에 있다. 과학적 방법, 지식, 객관성 모두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늘 특정한 시공간적 조건에서 형성된다. 

1970년대의 STS 학자들은 과학지식을 자연의 진리와 일치시키는 전통적인 관념에 도전하여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 집단은 선행하는 믿음 체계에 따라 감각경험을 해석하기 때문에, 외적 요인에 ‘오염’되지 않은 지식이란 없으며 모든 지식에는 사회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성공한 과학과 실패한 과학 모두 동등한 종류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대칭성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데이비드 블루어, 2000). 그러나 이들은 과학에 대한 사회적 설명을 추구함으로써 그 부작용으로 자연적 설명을 상실하였다. 각 과학자 집단이 이념, 담론, 권력, 기호 등에 따라 같은 자연을 다르게 표상한다면, 자연 자체는 그들의 표상이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자연에 호소하는 것은 과거의 본질주의로 퇴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사회구성주의자들이 자연을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추방할수록 오히려 자연이 공고해지고 자연과 사회의 간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과학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 사회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문제가 된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는 실증주의자들의 자연이, 반대쪽에는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언어, 표상, 문화가 양극을 이루었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의제를 계승하면서도 이들이 간과한 물질세계를 재조명하여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유물론이다.

신유물론은 과학을 순수한 자연으로도, 순수한 사회로도 보지 않는다. 과학은 무엇보다도 평평한 존재론적 장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런 평평한 접근은 자연적 사실이나 사회적 구조에 우위를 두지 않으며 동등한 층위에서 물질적, 언어적, 기술적 요소들의 역동적인 만남과 공동생산을 좇는다. 특히 강조되는 것은 물질세계의 생동하는 힘이다. 과학적 실천에서 비인간 사물, 생물학적 몸, 체화된 경험은 사회적 힘에 의해 각인되는 수동적인 질료가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다른 행위자들과 상호작용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변화를 일으키는, 말하자면 ‘반격하는(punch back)’ 능동적인 참여자이다. 이는 자연의 독립된 실재를 상정한 근대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물질과 언어, 자연과 사회는 불가분하게 뒤엉키며 매번 독특한 과학적 삶과 지식을 형성한다(Alaimo & Hekman, 2008; Coole & Frost, 2010).

이 글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주제로 글을 써달라고 요청받은 한 대학원생은 많은 부담감을 안고 과학에 대한 신유물론적 이해를 소개한다. 우선 2장에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ANT(Actor-Network Theory, 행위자네트워크 이론)를 살핀다. 라투르에 의하면 과학은 실험실의 물질적 배치와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 맺기를 통해 구성되며, 과학적 실재 또한 이렇게 쌓아 올려지는 것이다. 3장에서는 라투르의 계보를 잇는 신유물론 학자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라투르식 ANT와 마찬가지로 비인간 행위성을 강조하지만, 그에 더해 과학 실천에서 연구자의 몸, 그리고 물질과 담론의 얽힘(entanglement)을 더 적극적으로 파고든다는 차이가 있다. 마지막으로 글의 결론에서는 좋은 신유물론 연구를 위해서는 무엇을 추구하고 또 주의해야 하는지 고민해 본다.


라투르와 비인간 행위성

STS를 논하면서 브뤼노 라투르를 빼놓을 수 없고, 라투르를 논하면서 ANT를 빠뜨릴 수 없다. 라투르가 발전시킨 ANT는 비록 이론으로 불리지만 사실 방법론에 가까운데, 완성된 과학 지식보다는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science-in-the-making)’을 촘촘히 따라간다. ANT의 관점에서 과학은 ‘발견’이 아닌 ‘발명’, 정확히는 여러 인간 및 비인간과 동맹을 맺고 안정화하여 다른 이들의 도전에 방어할 수 있는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는 일이다. 과학의 본질은 연구자의 인지 능력이나 윤리 의식보다도 세계를 평평하게 펼쳐놓고 조작 가능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ANT에서 가장 급진적인 측면은 비인간 행위성이다. 행위성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비인간도 발휘하는데, 인간과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행위자는 누구와 어떤 연합을 맺느냐에 따라 능력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는 연합을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네트워크 속에서 함께 변형된다. 이처럼 물질세계의 존재론을 재조명하고 비인간을 인간과 동등한 층위에 위치시킴으로써 라투르는 블루어의 대칭성 원칙을 인간과 비인간의 대칭성으로 대체한다.

과학적 현상 혹은 사실이 구성되는 데에는 실험실의 물질적 배치가 필수적이며, 물질적 배치 없이는 과학지식도 없다. 1979년에 쓰인 『실험실 생활』에서 라투르는 과학 실천의 주요 기구로서 ‘기입 장치(inscription device)’에 주목한다. 기입 장치의 특징은 어느 재료물질, 가령 쥐 뇌에서 추출한 물질을 수치나 도표로 변환시킨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시선은 기입 장치에 입력된 표본보다도 그것이 출력해 낸 수치와 문서를 좇는다. 만약 다음 단계로서 그 수치가 컴퓨터에 입력되고 컴퓨터는 또 다른 자료 용지를 출력한다면, 다시금 이전의 수치는 버려지고 컴퓨터가 출력한 용지가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거듭난다. 연구자의 하루 일과 대부분은 기입 장치를 다루면서 “코드를 써넣고, 표시를 해두고, 바꾸고, 수정하고, 읽고, 쓰는 데” 소모된다(브뤼노 라투르, 2019: 68). 이렇게 길고 꼼꼼한 기입 과정을 거친 후에는 하나의 그래프 같은 최종 산물이 남게 되고, 그 생산을 가능케 한 모든 중간 단계는 잊혀져, 최종 산물은 원재료 그 자체와 다름없다고 여겨진다.

1987년 출판된 『젊은 과학의 전선』에서 라투르는 ANT를 본격적으로 개진하면서 과학을 일종의 전장(戰場)처럼 그려낸다. 과학자가 사실을 구축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 및 사물이 기존에 맺고 있던 ‘동맹'을 끊고 자신과 동맹을 맺도록 전향시키는 ‘협상’의 과정이자 ‘힘겨루기(trial of strength)’이다. 한 예시는 미생물이 세균으로부터 생성된다는 세균 이론을 주장한 파스퇴르와 미생물이 스스로 발생한다는 자연발생설을 지지한 푸셰(Félix-Archimède Pouchet) 간의 논쟁이다. 파스퇴르는 살균된 물을 담은 플라스크는 고지대에서 오염되지 않고, 비슷한 실험을 한 푸셰가 사용한 수은이 오염되었음을 보임으로써, 미생물이 푸셰를 ‘배신’하도록 만들고 자신과 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이로써 파스퇴르는 미생물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고 그를 대신하여 발언하는 ‘대변인’이 될 수 있었다(브뤼노 라투르, 2016).

때로 과학자는 새로운 대상에 형체를 부여하여 동맹을 맺기도 한다. 우선은 아직 정의되지 않은 대상을 가열하거나 산에 반응시키는 등 일련의 시험을 가한다. 그 대상이 기입 장치를 통해 내놓는 대답의 목록은 그것을 정의하게 된다. 예컨대 초기의 효소는 ‘효소’로 불리는 대신 ‘핵의 무정형임, 전기적으로 중성임, 알코올에서는 녹지 않지만 약 알코올에서는 용해됨, 아세테이트에 의해 침전되지 않음’ 같이 그것이 해낸 일들, 이를테면 그것이 견뎌 낸 ‘고난’의 리스트로 불렸다. 이처럼 여러 학문 분과에서 파생된 일련의 시험에 대한 반응들은 그것을 ‘점진적으로 형성’하며 형체 내지 한계를 부여한다. 그러다 대상은 이름을 부여받고 ‘블랙박스화’ 된다. 대상을 만들고 정의하는 데 투입된 수많은 시험과 장치가 잘 안 보이게 되고 그 대신 하나로서 작동하는 사물이 남는 것이다. 만약 반대자가 이 블랙박스를 논박하고 싶다면 여기에 내재하는 방대한 시공간적 요소들의 연합을 끊어내야 할 것이다(브뤼노 라투르, 2016).

혹자는 과학적 사실이 구성된다는 라투르의 주장을 반실재론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Ian Hacking)은 『실험실 생활』을 읽고 라투르가 강한 반실재론자라고 주장했다. 해킹은 특히 다음의 구절에 주목했다. “‘실재’를 들어 왜 어느 진술이 사실이 되는지 설명할 수 없는데, 실재의 효과는 사실이 확립된 이후에야 획득되기 때문이다.”(브뤼노 라투르, 2019: 237; Hacking, 1988) 만약 TRH(갑상샘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의 구조가 1969년에 합의되었다면, 1969년 이전에는 지금의 TRH 구조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라투르는 결핵균이 1882년에 규명되었기 때문에 람세스 2세가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현대 의료계의 판정이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어떻게 죽은 지 3천 년이 지나서 생긴 병에 걸릴 수 있단 말인가? 람세스 2세가 결핵으로 죽었다는 말은 그가 “마르크스주의 격변, 기관총, 혹은 월스트리트 붕괴”로 인해 운명했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Latour, 1999: 248). TRH나 결핵이 예전부터 존재해오며 단지 발견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믿음은 새로 생겨난 사실이 과거에 소급 적용된 결과에 불과했다. 

그러나 과학이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과 과학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과학적 사실이 고정되어 있다고 여겨야만 실재론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과학을 실재 자체를 시간적으로 조작하고 바꾸는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컨대 파스퇴르는 눈에 보이지 않던 미생물을 야생에서 분리해 직접 배지에 배양했고 여러 목적에 맞추어 길들였다. 파스퇴르의 손에서 미생물은 영양 배지, 배양 온도, 농장주 등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기존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Latour, 1988). 아울러 과학적 사실은 연쇄되는 기입 장치에 의해 물질적으로 지탱된다. 비록 최종 도표를 원재료의 ‘직접적 지시자’로 여기는 것은 환상이지만(브뤼노 라투르, 1999), 이 모든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물질과 언어를 평평한 존재론적 장에서 연결하고 공고히 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에도 대상과 서술을 연결하는 사슬은 필요할 때마다 되짚을 수 있도록 유지되어야 하고, 사실문제를 구성하는 이 사슬은 “그것의 가장 약한 연결 고리 딱 그만큼만 강하다.”(브뤼노 라투르, 2016: 249) 이런 점에서 라투르에게 과학적 사실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기성품(ready-made)이 아닐 뿐, 물질적이고 가시적이며, 인간의 의지에 아무렇게나 휘둘리지 않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신유물론과 행위성의 얽힘

물질의 힘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신유물론은 라투르에 빚지고 있지만, 21세기의 신유물론 철학에는 훨씬 다양한 갈래가 있다. 들뢰즈(Gilles Deleuze)의 정동 이론에 근거하여 신체 간의 감각과 정서적 교감을 살피는 분파도 있지만, 유기적 신체는 물론 송전선이나 흙 같은 무기물의 활력을 강조하는 생기적 유물론도 있다. 자연과학 지식을 재해석하여 여성적 신체와 성차의 물질-담론적 수행을 추적하는 신유물론 페미니즘도 큰 축을 담당한다. 물론 이들 모두 근대사회에 편재하는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물질세계를 조명한다는 의제를 공유하고 있다.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물질은 외력에 의해 주조되거나 움직이는 수동적인 재료가 아니라, 생성적이고 창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주변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유동적인 상태에 있다. 이때 인간은 물질로부터 동떨어진 추상적인 주체가 아니라, 모든 인간, 심지어 연구자 본인도 체화된 존재이자 물질세계의 일부로서 물질의 “생산적 우연성”에 “철저히 말려들어 가” 있다(Coole & Frost, 2010, p. 7). 결국 모든 경우에 물질이 ‘무엇인지’보다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과학에 대한 신유물론의 최근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라투르식 ANT가 어떤 비판에 직면하였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선 ANT는 사물이나 실험 장치에 경도되어 인간 신체를 경시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예를 들어 ANT 학자들은 ‘비인간 행위성’과 ‘물질적 행위성’를 자주 동의어로 혼용하는데, 이는 비인간과 물질을 일치시키면서 마치 인간은 물질과 대립 구도에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강조하듯이 모든 비인간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물질적인 존재였고, 같은 인간이라도 다양한 유형의 신체, 심지어 인간과 기술이 혼재된 사이보그적인 신체가 존재했다(도나 해러웨이, 2019). 또한 ANT는 실제 연구에서 물질과 담론의 출현이나 얽힘보다는 이미 완성된 행위자들의 만남을 다룬다는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 ANT 학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인 ‘이종적(heterogeneous)’이라는 말 자체가 선행하는 개별 요소들을 상정하지 않는가? 이종적인 행위자들의 동맹 맺기를 살피는 것은, 자연과 사회에 걸쳐 있는 요소들의 불가분성을 살피는 것과 달랐다(Gingras, 1995). 이런 배경에서 신유물론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접근을 통해 물질성에 놓은 초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라투르식 ANT의 한계들을 보완하고자 한다.

첫째로, 신유물론은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주요 행위자로서 신체를 조명한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글 「위치 지어진 지식」(“Situated Knowledges”)에서 위로부터 아래를 향하는 전지(全知)적인 시선을 표방하는 과학의 전통적인 ‘시선’을 문제 삼는다. 인간 주체가 객체와 거리를 두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한다는 관념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모든 시선은 특수하게 체화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보는 행위는 수동적이고 제약 없는 활동이 아니라, 독특한 유기적·기술적 몸을 통해 함양되는 감각이자, 세상을 조직하는 능동적인 수행이기 때문이다. 전지적인 시선, 혹은 “모든 한계와 책임의 초월을 약속하는 속임수의 시선”과 달리, 이 시선은 특수하게 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위치를 집어낼 수 있고 따라서 더 책임감 있고 심지어 더 객관적이다. 이렇게 생산된 지식이 “부분적이고, 위치를 집어낼 수 있고, 비판적”임을 인식하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오히려 연대와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해러웨이는 과학이 중립적인 지식, 혹은 구성된 담론이라고 축소하는 대신, 특정한 몸과 기술을 가지고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일종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Haraway, 1991: 190-191).

과학은 몸의 손짓 발짓과 다섯 감각을 모두 동원하는 체화된 실천이다. 나타샤 마이어스(Natasha Myers)가 단백질 결정학 연구실에서 실시한 현장 연구는 이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삼차원 단백질 모델을 구상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눈으로 관찰만 하는 게 아니라, 단백질을 느끼고 표현하기 위해 “손, 팔, 어깨, 머리, 목, 몸통, 심지어 다리”를 가지고 운동적이고 정동적인 수행에 임한다는 것이다(Myers, 2015: 18). 숙련된 과학자일수록 팔을 머리 위로 접고, 목을 구부리고,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식으로 단백질과 동감하며 알맞은 구조를 고민한다. 이 과학자는 이리저리 잘못 접힌 조악한 모델을 보면 단백질에 빙의하여 근육과 위(胃)의 통증을 호소하고, 반면 잘 접힌 모델을 접하면 단백질이 ‘행복하다’거나 ‘편안하다’고 감지하고 심지어는 ‘숨 쉬고 있다’고 느낀다. 이러한 신체적인 교감에서 과학자의 몸과 단백질 분자의 간극은 무너진다(Myers, 2015). 비슷하게 자넷 베르테시(Janet Vertesi)는 화성 탐사로봇(혹은 로버, rover) 연구자들이 ‘로버처럼 보기’ 위해서 직접 팔다리를 움직여 로버의 움직임을 흉내 낸다고 말한다. 몸을 기울여서 로버의 각도와 흔들림을 재현하고, 양팔을 뻗어 로버의 태양 전지판을 표현한는 식이다(Vertesi, 2015). 이처럼 과학자의 몸은 사고에 동원되는 일종의 실험 매체로서, 때에 따라 ‘분자화’되거나 ‘기계화’되며, 몸이 달라지면 과학도 달라진다.

둘째로, 신유물론 학자들은 과학 실천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구성을 강조한다. 앞서 살핀 단백질 결정학의 사례에서도, 과학자의 몸과 단백질 분자가 일심동체가 되어 서로를 형성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학자와 단백질은 완성된 채로 만난 게 아니라 상호 교감으로부터 형체를 획득했다. 과학철학자 카렌 버라드(Karen Barad)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은 바로 이러한 행위성의 얽힘과 상호적 형성을 개념화한다. 행위적 실재론에서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담론, 자연과 사회는 선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분석은 무엇보다도 ‘현상’의 단위에서 출발한다. 현상은 ‘내부-작용(intra-action)’하는 물질적 실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내부-작용은 ‘상호작용’과 달리 요소들의 구분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현상의 존재론적 불확정성을 해소하는 것은 ‘장치(apparatus)’이다. 장치는 통상적인 의미의 실험 도구를 넘어서는, 역동적이고 열려 있는 물질-담론적 실천이다. 장치는 현상을 독특하게 ’자름‘으로써 현상 내의 외재성, 즉 개별 요소들의 윤곽을 그려내고 이들 간의 인과관계를 확립한다. 이렇게 생산된 존재론적 분리야말로 과학적 객관성의 토대가 된다(Barad, 2006).

버라드가 행위적 실재론의 눈으로 분석하는 한 사례는 192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실시된 슈테른-게를라흐(Stern-Gerlach) 실험이다. 두 물리학자는 자기장에 은 원자 빔(beam)을 통과시키고 빔이 유리판에 남긴 자취를 측정하여 공간 양자화(space quantization)의 근거를 찾고자 했다. 이는 매번 은을 데우고, 진공을 만들고, 고장에 대응하는 까다로운 노동이었다. 거듭된 실패 끝에 눈에 보이지 않던 빔의 자취가 가시화된 것은 우연이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스턴은 실험실에서 늘 값싼 시가를 피웠는데, 질 나쁜 시가가 내뿜은 황(黃) 연기가 의도치 않게 은을 황화(黃化)하여 자취를 새까맣게 만든 것이었다. 버라드는 스턴의 넉넉지 않은 형편과 흡연 습관이 실험을 성공시킨 장치의 일부였음을 강조한다. 시가 흡연이라는 남성성의 수행이,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개인으로서 스턴의 형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독특한 과학적 결과를 산출하였다는 것이다. 즉 실험실 안팎을 아우르는 그때의 특수한 조건은 ‘주체’와 ‘대상’을 공동으로 생산하였다. 과학을 만드는 실천, 사회를 만드는 실천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매번 독특한 물질-담론적 실천으로부터 과학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이 동시 출현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Barad, 2006).


나가며: 좋은(나쁜) 신유물론 연구란 무엇인가?

하나의 과학적 진리라는 관념은 더 이상 성립하지 못한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과학 안에서도 늘 여러 상충하는 목소리가 오간다. 예를 들어 비만의 원인에 관해서 유전학자, 역학자, 내분비학자, 임상의학자가 하는 말이 각기 다르고, 유전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대립형질이 비만을 일으키는지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일어난다. 심지어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이라도 그에 개입하는 방법에 따라 매번 다른 존재로서 실행된다(enact)고 주장한다(아네마리 몰, 2022). 과학을 늘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신체적 실천으로 보고, 이를 실재론과 객관성의 근간으로 삼는다면, 과학에서 다원성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된다. 게다가 이런 대안적인 과학의 상이 더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베일이 벗겨지기만을 기다리는 자연의 진리가 아닌, 물질, 담론, 신체, 정치, 정동이 매번 독특하게 얽히고설키는 살아 있는 현장 말이다.

물론 이런 생생한 현장을 연구에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잘 쓴 신유물론 논문은 서로 닮았지만, 잘 못 쓴 신유물론 논문은 저마다의 이유로 별로이다. 잘 쓴 신유물론 연구는 진행 중인 과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참여자가 물질적인 존재임을 유념하며, 얼핏 보기에 지저분한 실행들을 꼼꼼히 추적하여 창의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그에 반해 잘 못 쓴 신유물론 논문은 각기 나름의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서는 그런 연구의 유형을 몇 가지 지목하고자 한다.

첫째는 각종 비인간 사물을 나열하고는 이들에게 ‘비인간 행위성’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내가 접한 한 국내 논문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전개되었다. ‘A라는 현장에는 B, C, D, E 등 온갖 사물이 중심을 차지하며 인간을 압도한다. 사물이 먼저 존재하고, 사물의 의도에 맞추어 인간이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물의 귀환은 존재론적 전환이라는 혁명을 이끌어냈다.’ 이 서술은 존재론적 전환의 의미를 곡해할 뿐만 아니라 미리 주어진 개별 사물들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유물론의 존재론은 무엇보다도 관계적이며, 사물의 형체와 행위능력은 결코 독립적이거나 자발적이지 않고 그것이 맺는 관계와 주고받는 영향에 따라 창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역할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어떤 비인간이 공존하는지 일일이 지목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련의 행위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짓고 안정화하는지 살피는 것이 돼야 한다.

또 자주 보이는 허술한 연구 방법은 ‘당사자성’과 인터뷰 조사기법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다. 약자를 향한 관심을 강요하지 말라는 극우 정치인스러운 주장을 펼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다만 과연 대표성을 지니는지도 의심스러운 당사자들을 잔뜩 인터뷰한 뒤에, 마치 원심분리기를 돌리듯이 그로부터 물질에 관한 내용만을 추출하는 것은 좋은 신유물론 방법이 아니다. 물질의 관계성을 간과하는 앞선 문제와 더불어, 의식이나 일상적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신체 작용이나 주변 환경의 요소들을 놓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담론으로부터 물질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그 자체로 다루기 위한 세심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때 전문가적 지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연구적 자원으로 전용하는 방법이 유용할 수 있다(Wilson, 2015).

셋째는 ‘생명-(bio-)’ 개념에 주객전도되는 것이다. 푸코가 고안한 ‘생명정치(biopolitics)’ 및 ‘생명권력(biopower)’에서 파생되어, ‘생명자본(biocapital)’, ‘생의료화(biomedicalization)’, 생물학적 시민권(biocitizenship)’, ‘생명경제(bioeconomy)’, ‘생명노동(biolabor)’ 같이 온갖 단어에 ‘생명-’을 접두사로 붙이는 추세는 피로감을 자아낸다. ‘생명-’을 접두사로 쓰는 것은 생명 자체가 자본, 가치, 정체성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렇게 주조된 개념들은 혼자서는 아무런 설명적 힘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물질에 대한 더 면밀하고 세세한 분석을 대체하는 간편한 도구가 되었다. 특히 생명이 어떻게 등장하고 행위하는지 파고들기보다는 오히려 ‘생물학적인 것을 물신화하는 효과를 낸다(Birch, 2017). 반면 신유물론의 평평한 존재론적 장에서, ‘생명-’ 개념은 물론 ‘자본주의’, ‘제약산업’, ‘의료기술’ 같은 모든 거시 범주는 설명적 자원이 아닌 설명의 대상이며, 실제로는 모두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작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론적 논의는 구체적인 사례연구에 의거하여 그와 함께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거대서사가 알아서 내놓는 게 아니다.

이상으로 바람직한 신유물론 연구를 위한 나름의 제언을 내놓았고, 이쯤 되니 ‘너는 얼마나 잘하길래’라며 내 논문을 검색해 볼까 봐 걱정되는데 그러지 말길 부탁드린다. 어쨌든 STS 학자로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과학을 색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과 사회, 물질과 담론, 거시와 미시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근대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이분법들에 도전하는 데서 신유물론의 고단한 길이 시작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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