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몸
생물학적인 몸을 위한 변론: 과학기술학으로 트랜스젠더 말하기●
윤수민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stardust29@snu.ac.kr
201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가 급부상하였으며, 그 이후 온라인 여초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즘’, ‘리버럴 페미니즘’, ‘교차성 페미니즘’ 등의 구분이 통용된다. 그 중 ‘래디컬 페미니즘’과 나머지 페미니즘을 구분하는 기준은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입장 차이에 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트랜스 혐오 담론을 적극적으로 주도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인 여성’만이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고, 트랜스 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이효민, 2020: 226).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과 비여성을 가를 수 있는 ‘생물학’이라는 뚜렷하고 객관적인 잣대가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생물학은 객관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다.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는 ‘생물학’에 대한 잘못된 전제를 하고 있다.
우리는 생물학이 무엇인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이론, 그리고 과학기술학의 접점에서 우리는 생물학에 관한 더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자연과 인공의 이분법을 비판하며, 모든 생물학에는 인간이 개입함을 보여준다.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은 의료 실천의 영역에서 몸이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며, 몸을 단일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한다. 이 글에서는 해러웨이와 몰의 논의, 그들의 논의를 발전시킨 사라 프랭클린(Sara Franklin)과 라탐(J. R. Latham)의 연구, 그리고 의료적 실천의 현장에 관한 과학기술학 연구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생물학적인 몸’이라는 용어가 더 다양한 몸을 변호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글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용어를 타파하는 대신 그 외연을 넓히는 데 목적을 둔, 더 다양한 ‘생물학적인 몸’을 위한 변론이다.
사이보그를 선언하기: 트랜스-생물학의 세상
우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생물학적 여성’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때로는 지정 성별을, 때로는 염색체를, 때로는 외부 성기를 기준으로 하는 ‘생물학적 여성’의 다양한 정의는 모두 의료 기술의 개입을 간과한다. 가령 호르몬 치료를 거쳐 에스트로겐 수치가 평균 여성보다 높은 트랜 스 여성, 수술하여 외부 성기가 바뀐 트랜스 여성은 그들의 기준에서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생물학적 여성’은 트랜지션 기술의 개입을 배제한 생물학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1]
하지만 인간의 개입을 배제한 생물학은 없고, 있을 수도 없고, 있었던 적도 없다. 이러한 논의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1985)이 쓰인 시대에도 이미 활발했다.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 유기체(cybernetic organism), 즉 기계와 유기체의 혼종(hybrid)이다. 해러웨이는 우리가 모두 사이보그라고 한다. 우리는 자연과 기계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지는 존재가 아니며, 인공적인 기술이 개입하지 않는 생물은 없다는 뜻이다. 이 선언은 20세기 말에 이미 생물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논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Haraway, 1991: 149-150). 당시에도 생물학은 인간이 개입하는 기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유전자 코딩과 판독만 봐도 그런 점을 알 수 있다(Haraway, 1991: 164).
사라 프랭클린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에 착안하여 사이보그 배아와 트랜스-생물학(trans-biology)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인간 배아 줄기세포(human embryonic stem cell, hES) 유도 실험실에서 볼 수 있는 사이보그 배아는 태어나기 전의 배아 상태부터 이미 과학기술과 얽혀 있는 사이보그이다. 사이보그 배아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기술과 같이, 태어나기 전부터 과학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생물학을 프랭클린은 트랜스-생물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이제 트랜스-생물학을 생물학의 특수한 경우로 보기에는 너무 흔하다(Franklin, 2006: 171).
태어나기 전에도 이미 과학기술과 얽히는 트랜스-생물학의 세상에서 우리는 태어난 대로의 성별을 ‘생물학적인 성별’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트랜지션 기술을 배제한 기준으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태어남’ 이전에는 기술이 개입하지 않았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사이보그 배아는 태어나기 전부터 과학기술과 얽혀 있고, 그런 상황이 특수하지도 않다. 그러니 트랜스-생물학의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전혀 과학기술과 독립적인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트랜스-생물학의 시대 이전에도 기술과 독립적인 ‘생물학적 여성’은 정의할 수 없었다. 유전자 코딩과 판독, 배아 줄기세포 유도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 이전에도 인간의 개입과 독립적인 생물학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과 분리된 생물학은 점차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프랭클린이 인간의 행위와 독립적인 생물학적 세계에 대해 제기하는 의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개입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외적 현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상호작용은 일방적이지 않은 서로 간의 개입이므로, 현실을 알기 위한 시도는 앎의 구성에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Franklin, 2006: 169). 생물학 연구는 이미 상호작용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개입이 없는 생물학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인 몸’은 인간의 과학기술이 영향을 주기 이전의 순수한 몸이 아니다. 인간의 영향이 얽히지 않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생물학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했던 적도 없다. 그러니 트랜지션 이전의 ‘생물학적 성별’이 있다는 판단은 생물학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여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의료 기술을 배제한 생물학은 없다.
다중적 몸, 다중적 섹스
앞서 과학기술 없이는 정의될 수 없는 생물학의 모습을 바탕으로 의료 기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여성만 ‘생물학적 여성’으로 정의하는 것을 문제 제기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보고 과학기술을 고려하여 새롭게 정의한 생물학을 통해서는 ‘생물학적 여성’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하나의 명확한 기준으로 단일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섹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측정하고 평가하고 판단할 때 우리는 한 대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라, 매번 다른 대상을 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섹스는 다중적이다.
섹스의 다중성을 논하기에 앞서, 이 글에서 섹스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명확히 하기로 한다. 앞서 사용한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용어는 사회문화적인 젠더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 용법은 생물학과 문화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논리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 글은 섹스를 젠더와 뚜렷이 구분되는 별개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의료적 실천의 영역에서의 섹스에 주목한다. 의료적 실천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회문화적 섹스와 생물학적 섹스가 구분되지 않는다. 의료적 실천의 현장에서는 ‘생물학적 성별’과 젠더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의료적 맥락에 들어맞는 하나의 섹스가 정의되지도 않는다. 이 글에서 ‘섹스’라는 용어는 이러한 의료적 실천의 현장을 고려하여 사용된다. 또한 섹스가 아닌,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용어는 객관적이고 단일한 성별을 정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인용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다중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네마리 몰은 동맥경화증에 관한 민족지 연구(Mol, 2002)에서 다중적으로 실행(enact)되는 몸과 질병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몸은 맥락에 따라 다른 대상이 된다. 우리가 동맥경화증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묻는다면, 동맥경화증에 관한 지식을 얻는 다양한 ‘관점’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동맥경화증에 관해 환자와 의사가 다르게 알고 있을 수는 있지만, 알고 있는 대상 자체는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의료 실천의 현장은 이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질병을 치료할 때는 측정, 감각, 절단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질병과 상호작용을 계속할 뿐, 질병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몰은 이런 상호작용을 몸과 질병의 다양한 ‘실행’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명확한 지식이 가정하는 하나의 대상과 달리, 실제로 실행되는 대상은 맥락에 따라 다르다. 똑같이 동맥경화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환자가 걸을 때 경험하는 고통과, 의사가 측정하는 발의 약한 맥박, 그리고 혈관 외과의가 동맥에서 제거하는 플라크는 모두 다른 대상이다. 맥락마다 상호작용하는 대상이 다르니 동맥경화증을 단일한 대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질병뿐만 아니라 섹스도 다중적으로 실행되는 대상으로 읽을 수 있다. 트랜스젠더 연구자이자 트랜스 남성인 라탐은 몰의 연구를 기반으로 섹스의 다중성을 분석하였다. 그는 2017년 연구〈섹스 (재)구성하기: 젠더 클리닉의 실행학((Re)making sex: A praxiography of the gender clinic)〉에서 몰의 방법론을 차용한 “실행학(praxiography)”으로 의료 실천의 현장을 조사하였다(Latham, 2017). 자신의 트랜스섹슈얼로서의 의료적 경험,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유방 절제 수술을 받는 과정을 분석하여 ‘트랜스섹슈얼리티’가, 그리고 섹스가 어떻게 다중적으로 실행되는지를 보여주었다.[2]
라탐이 연구한 젠더 클리닉 현장에서는 섹스라고 불리는 것이 다양한 맥락에서 각각 다른 대상과의 상호작용으로 드러난다. 수술 집도의에게는 섹스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집도하는 의료적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는 대상인 섹스가 단일하지 않고 유연하다. 하지만 섹스는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좌표(coordinate)로 측정되기도 한다. 단일한 수치로 측정되는 섹스는 유연한 수술 집도의의 섹스와는 다른 대상이다. 정신과에서는 섹스를 믿을 만한 내러티브로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정신과 의사가 성기를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 라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섹스는 성기가 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의사는 섹스를 성기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Latham, 2017). 이렇게 진단을 포함한,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라탐의 섹스는 수없이 다중적으로 실행되며, 맥락에 따라 라탐은 남성이 되기도, 여성이 되기도, FTM이 되기도 한다.
의학적 과정에서 다중적으로 실행되는 섹스를 보면 하나의 ‘생물학적 성별’을 정의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몰이 토대를 마련하고 라탐이 보여주었듯이, 의학에서도 섹스를 포함한 몸이 하나의 기준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테스토스테론 수치도, 염색체도, 성기도, 내러티브도 단일하게 섹스를 정의할 수 없고, 동시에 이 모든 맥락에서는 다른 섹스가 실행된다. 그러니 ‘생물학적 여성’을 지정성별을 기준으로 정의할 것인가, 호르몬 수치나 염색체로 정의할 것인지는 무의미한 논의이다. 지정성별, 호르몬 수치, 염색체를 포함한 다양한 맥락에서 ‘여성’은 모두 다르게 실행되기 때문이다. 기준에 따라 섹스를 다르게 판단하게 되는 것은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각 기준이 실행하는 섹스가 다른 것이다. 모든 사람의 섹스를 명확히 가를 수 있는 기준은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규범적 신체 변형, 괴기한 신체 변형
한편 트랜지션에 대한,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은 모든 사람의 섹스를 명확히 가르는 기준을 전제하고 있다. 트랜지션은 서로 반대되는 듯한 두 방향에서부터 비판받는다. 한쪽에서는 트랜지션이 규범을 따른다고 비판한다. 가령, 트랜스 여성의 트랜지션은 ‘여성’에 대한 규범을 따르기 위해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성역할이 강화된다고 한다. 반대쪽에서는 트랜지션이 규범에서 벗어나 기괴함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비판받는다. 예를 들어 성확정수술을 신체 절단과 비교하여 ‘멀쩡한 신체를 불구로 만드는’ 행위로 여기거나, 트랜스 여성의 성확정수술을 “자지 공예”라고 부르며 섹스를 바꾸는 데 실패한 조잡한 변형으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3]
그런데 트랜지션이 ‘여성’의 규범을 따른다는 것은, 반대로 이미 규범적 여성이 있음을 전제한다. 트랜지션이 기괴함을 추구한다는 비판도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전제하기에 트랜지션이 그 이분법을 이탈하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두 논의 모두의 배후에는 규범적 남성과 규범적 여성이 존재한다는 판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섹스만이 존재한다고 판단하게 되는 효과를 낳는다.
니키 설리반(Nikki Sullivan)은 이상한/기괴한 타자 되기/벗어나기((un)becoming)의 과정을 뜻하는 ‘괴기-변형(transmogrific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4] 이는 트랜지션과 성형수술 등을 타투나 피어싱과 같은 일상적 몸 변형, 그리고 난절(scarification)이나 낙인(branding)과 같은 비주류 몸 변형과 함께 보는 개념이다.[5] 여러 신체 변형 사이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그 차이를 ‘좋은’ 체현과 ‘나쁜’ 체현으로 나누는 기존의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Sullivan, 2013: 552-553). 설리반은 규범과 기괴 사이의 이분법을 비판하며, 괴기-변형을 통해 이러한 이분법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Sullivan, 2013: 562).
성형수술도 트랜지션처럼 일종의 괴기-변형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점은 성형수술이 이루어지는 의료적 실천의 현장에서 드러난다. 임소연(2012)은 성형수술에 관한 민족지 연구에서 성형수술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그는 성형수술이 획일적인 미인을 생산한다는 가치 판단으로 인해 성형수술의 과정이 해명(account)되지 않아 왔다고 한다(임소연, 2012: 211). 가치 판단을 하고 성형수술을 설명(explanation)하는 대신, 성형수술이 현장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기술(description)하는 그의 연구(임소연, 2012: 6)를 통해 우리는 규범과 기괴 사이의 이분법을 벗어날 수 있다.
임소연은 성형수술이 ‘제멋대로인(unruly) 기술’이라고 한다. 성형수술의 결과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임소연, 2012: 208). ‘성형수술’로 하루아침에 미인이 될 수는 없다. 임소연의 연구는 수술실에서 나온 뒤 환자가 감당해야 하는 붓기와 고통, 불안을 묘사하는데, 그 과정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예측할 수 없는 성형수술의 결과, 성형수술의 위험과 부작용을 홀로 감당하는 환자의 육체(임소연, 2012: 210)는 아름다움이라는 규범을 향하여 직진하지 않는다. 성형수술을 통한 ‘미인-되기’는 ‘기괴해지기’를 반드시 수반하며, 기괴한 타자가 되고, 기괴한 타자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일종의 괴기-변형으로 읽을 수 있다.
기괴한 타자를 거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형수술이라는 신체 변형을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수술 후 주의 사항’을 따르는 환자의 끊임없는 자기-돌봄은 ‘성형미인 되기’의 과정에 포함된다. 같은 주의 사항이라도 서로 다른 일상 속 다양한 변수들로 인해 자기-돌봄은 환자마다 다른 실행으로 나타나고, 그 실행의 차이는 성형수술 결과의 예측을 어렵게 한다(임소연, 2012: 116-117). 또한 성형수술 실행의 과정에는 환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의사, 간호사, 상담실장, 마케팅 담당자를 포함한 다양한 육체 및 수많은 사물도 개입한다. 성형수술을 통해 환자의 정체성이 재구성됨과 마찬가지로, 성형수술에 개입하는 다른 육체들의 정체성도 끊임없이 재구성된다(임소연, 2012: 208-209). 이러한 의료 현장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환자의 자기-돌봄 및 다양한 사물과 육체의 개입 또한 성형수술 과정의 일부로 포함하여, 성형수술이라는 신체 변형을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트랜지션이 이루어지는 의료적 현장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분석하면 트랜지션이라는 신체 변형에 대한 더 광범위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떠한 기술도 사람을 하루아침에 ‘생물학적 남성’에서 ‘생물학적 여성’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의 기괴한 타인 되기/벗어나기에 해당하는, 수많은 사물과 육체가 개입하는 실행의 과정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물학적 성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묻고 설명하는 대신 우리는 그 실행의 과정을 기술하고 해명해야 한다. 트랜지션을 괴기-변형으로 해명하는 데는 그 실행이 규범을 향하는지, 괴기함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불필요하다.
생물학적인 몸을 위한 변론
이 글에서는 사이보그와 다중적 몸, 괴기-변형의 트랜지션을 말함으로써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용어가 트랜스젠더를 비판하는 데 쓰일 수 없음을 변론하였다. 우리는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 통해 기술이 개입하지 않은 신체도,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생물학도 없다는 교훈을 얻는다. 몰의 다중적 몸은 다중적 섹스를 읽을 수 있게 하고, 단일하게 정의되는 ‘생물학적인 성별’은 없음을 알려준다. 의료 실천의 현장을 통해 우리는 트랜지션을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신체 변형을 괴기-변형으로 읽으면 트랜지션이 성역할을 강화하는 규범이라고 하거나, 괴기해지고 불구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이분법을 벗어날 수 있다.
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트랜스젠더의 과학기술학적 읽기에는 광범위한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이러한 가능성이 계속해서 탐구되기를 바라며, 트랜스젠더 이론과 함께 가는 과학기술학을 지지한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의 부정에 생물학이나 과학기술학을 동원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뿐만 아니라 생물학과 과학기술학에 대한 이해 또한 부족한 것이다. 과학기술학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생산하는 이분법으로부터 빠져나갈 방안을 담고 있다.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며, 다중적이고, 괴기한 생물학이 트랜스젠더 이론과 함께하는 미래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구지윤 (2023), 「한국 트랜스여성의 삶의 기획으로서 트랜지션 과정과 성형실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효민 (2020), 「래디컬 페미니즘의 급진성에 대한 검토」, 『문화과학』, No. 104, 225-238.
임소연 (2012), 「성형수술 실행의 사물, 육체, 그리고 지식의 네트워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Franklin, S. (2006), “The cyborg embryo: Our path to transbiology,” Theory, Culture & Society, Vol. 23, No. 7-8, pp. 167-187.
Haraway, D. (1991),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Latham, J. R. (2017), “(Re)making sex: A praxiography of the gender clinic,” Feminist Theory, Vol. 18, No. 2, pp. 177-204.
Mol, A. (2002), The body multiple: Ontology in medical practice, Duke University Press.
Sullivan, N. (2006), “Transmogrification: (Un)becoming other(s),” in The Transgender Studies Reader, eds. by Susan Stryker & Stephen Whittle, London: Routledge, pp. 552-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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