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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의 다학제적 성격이 강점이 되려면 (김석관)

동문기고


혁신학의 다학제적 성격이 강점이 되려면


김석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졸업 

kskwan@stepi.re.kr


저는 1992년에 과학철학 전공으로 입학해서(존경하는 임종태 교수님이 입학 동기입니다) 과학적 합의에 대한 라우든(Larry Laudan)과 쿤(Thomas Kuhn)의 견해를 비교하는 논문을 쓰고 졸업했습니다. 석사 졸업 후 취직을 하면서 과학기술정책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서 26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바이오 산업을 중심으로 섹터 기반의 혁신연구를 하다가, 점차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 스타트업 생태계 등 전체 섹터를 관통하는 주제별 연구로 옮겨왔고, 요즘은 한국의 성장 모델과 같은 거시적인 이슈나 이론적 문제들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과학철학을 전공하고 과학기술정책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동문으로서 과사철 협동과정이 학과로 승격되고 과학기술정책 전공도 개설된 것을 기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임종태 교수님이 학생들이 만드는 저널에 동문 글을 모집한다고 하셔서 축하의 마음을 담아 글을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혁신학의 정체성과 복합학 연구의 특성에 대해 최근 생각하던 내 용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짧게 나누고자 합니다.

혁신학(innovation studies)은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등 기존 사회과학 지식을 이용해서 기술혁신에 관한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는 ‘다학제적 응용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Martin, 2012). 그런데 다학제적 응용학문이라는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약점과 강점을 동시에 가지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응용학문으로서의 혁신학이 지닌 약점은 고유의 이론, 관점, 방법론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혁신학에서는 다른 분야의 이론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혁신학은 기성 학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혁신학의 약점은 강점이 될 수도 있 습니다. 다른 학문 분과들은 오래되고 성숙한 분야일수록 내부의 이론적 자원이 많고 내 분야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타 분야의 연구를 잘 참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그만큼 타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관점이 나타날 가능성도 낮습니다. 이에 비해 복합학으로서의 혁신학은 여러 분야의 이론을 참고하고 활용하는 것이 기본적인 루틴이기 때문에 분야간 융합을 통해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학문 분야간 융합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융합’이라고 하면 뭔가 심오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단순한 타 분 야 읽기의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분야의 지식을 결합해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을 창출하는 고차원적인 작업도 필요하지만, 단순히 다른 분야에서 확립된 지식을 습득하고 내 분야에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즉 융합 이전에 단순 결합만으로 도 아주 많은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학문이 분화되고 발전하다보니 내가 처음 다루는 문제같아도 찾아보면 이미 다른 분야의 누군가가 해결한 문제일 때가 많고, 내가 초보적으로 고민한 문제에 대해 다른 분야에서는 매우 정교한 논의를 진전시킨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융합의 의미를 가장 단순한 타 분야 읽기로 한정하더라도 확립된 분과 학문들 사이에서는 타 분야 읽기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여러 전공이 모여 있는 혁신학 내부에서도 확인됩니다. 단순히 타 분야를 읽지 않아서 논의가 더 진전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어터백(James M. Utterback)의 ‘제품과 공정 혁신의 동태적 모델’입니다(Utterback & Abernathy, 1975; Utterback, 1994). 과학철학을 전공했거나 쿤을 읽어본 사람 이 어터백의 책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단박에 ‘쿤의 기술혁신 버전’이라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모델은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와 매우 유사하고 어터백의 “지배적 디자인 (dominant design)”은 쿤의 “패러다임”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어터백은 1975년 논문과 1994년 단행본 모두에서 쿤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어터백이 쿤을 참고해서 자신의 이론을 더 발전시켰더라면 훨씬 더 개념적으로 정교한 이론이 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 경우 혁신학도 더 발전하고 혁신 학에서 그의 위치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한편 쿤의 논의를 기술혁신에 적용한 사람은 도시(Giovanni Dosi)입니다. 도시는 쿤의 패러다임 개념을 가져와서 기술 패러다임(Technological Paradigm)을 정의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어터백의 지배적 디자인 논의를 거의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도시는 유럽의 경제학자였던 반면 어터백은 미국의 경영학자였고, 쿤은 과학철학자였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학술 운동에 참여한 학자들은 1990년대 공산권의 붕괴, 자유화, 세계화라는 격변의 한가운데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을 찾는 과제에 맞닥뜨렸다. 이시윤이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비주류 학술 운동 출신의 신진 하버마스 연구 그룹이다. 이 그룹은 언어적 전회 이후 하버마스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탁월한 성과를 냈고, 경쟁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만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중심부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나아가 이들은 중심부 딜레탕트의 이목까지 끌어 특정한 관심사로 통합된 학술 공간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신진 연구자 그룹, 제도권의 학자들, 그리고 일부 좌파 학자들로 이루어진 하버마스 네트워크는 학술 행사나 학술지 특집호를 기획하는 등 활기를 띠었다.

둘째는 룬트발(Bengt-Åke Lundvall)의 국가혁신체제(National Innovation System, NIS) 논의입니다. NIS 개념은 1980년대에 프리먼(Christopher Freeman), 룬트발, 넬슨(Richard Nelson)이 각자 만들었고 합의된 정의 없이 사용되었는데, 룬트발은 2018년의 공저에서 미국의 NIS 개념과 유럽의 NIS 개념이 차이가 있다 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Chaminade et al., 2018: 9). 미국 학자들은 대학 등 연구기관이 주도하는 STI(Science, Technology and Innovation)형 혁신에 초점을 둔 협의의 NIS를 상정하는 반면, 유럽 학자들은 대학의 STI형 혁신과 더불어 기업의 숙련체제와 DUI(Learning by Doing, Using and Interacting)형 혁신도 중시하는 광의의 NIS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VoC) 논의에 익숙한 사람은 NIS 정의에서 나타나는 미국와 유럽의 차이가 VoC에서 말하는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와 독일식 조정시장경제 의 차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Hall & Soskice, 2001). 사실 제가 보기에는 VoC 논의가 NIS 논의에 비해 기술과 제도 사이의 관계를 다루기에 더 좋은 분석틀을 제 공합니다. 그래서 NIS 논의에 VoC 이론을 접목해서 발전시킨 학자들도 있습니다(Casper, 2000; Coriat & Weinstein, 2004). 그런데 NIS 개념의 원조인 룬트발은 2001년에 VoC 이론이 나온 후 한참 지난 2018년에도 VoC 이론을 전혀 참조하거나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룬트발은 경제학자이고 VoC 이론은 주로 정치 (경제)학자들이 다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 큰 제도적 맥락을 다루는 VoC 논의를 반영했더라면 혁신학은 기술과 제도의 관계에 대해 더 좋은 분석틀을 가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타 분야 읽기만으로도 각 분야들이 긍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혁신학은 여러 분야 에서 이론적 자원들을 빌려와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타분야 읽기를 통한 융합을 시도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혁신학에서 여러 기성 학문 분야의 융합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술혁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깊게 해주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 뿐아니라 그 결과가 거꾸로 기존 학문의 이론적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혁신학에서 기존 학문의 이론 A를 가져다가 다른 분야의 시각과 결합해서 A+a를 만들었다면, 그것 자체가 A 이론을 제공한 기존 학문에게도 어떤 이론적 시사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제도주의 이론과 관점을 기술혁신 연구에 적용했는데, 그 결과가 제도 변화 일반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면, 거꾸로 혁신학이 신제도주의 이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맨날 다른 분야의 도움만 받던 혁신학이 이런 식으로 그 빚을 갚을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 최근의 사회적 환경은 그럴 가능성을 더 높여주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Casper, S. (2000), “Institutional Adaptiveness, Technology Policy, and the Diffusion of New Business Models: The case of German Biotechnology,” Organization Studies, Vol. 21, No. 5, 887-914. 

Chaminade, C., Lundvall, B. Å. & Haneef, S. (2018), Advanced Introduction to National Innovation Systems. Edward Elgar Publishing. 

Coriat, B., & Weinstein, O. (2004), “National Institutional Frameworks, Institutional Complementarities and Sectoral Systems of Innovation,” in Malerba, F. ed. Sectoral Systems of Innovation, Concepts, Issues and Analyses of Six Major Sectors in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Dosi, G. (1982), “Technological Paradigms and Technological Trajectories: a Suggested Interpretation of the Determinants and Directions of Technical Change,” Research Policy, Vol. 11, No. 3, 147-162. 

Hall, P. A. & Soskice, D. (2001), “An Introduction to Varieties of Capitalism”, in Varieties of Capitalism: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Comparative Advantage, Oxford University Press. 

Kuhn, T. S. (1962; 1970; 2012),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h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Martin, B. (2012), “The Evolution of Science Policy and Innovation Studies”, Research Policy, Vol. 41, No. 7, 1219-1239. 

Utterback, J. M. (1994), Mastering the Dynamics of Innovation: How Companies Can Seize Opportunities in the Face of Technological Change.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Utterback, J. M. & Abernathy, W. J. (1975), “A Dynamic Model of Process and Product Innovation,” OMEGA, Vol. 3, No. 6, 639-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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