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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저널 제3호(2026.06.)

'사이'는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들이 만드는 학생저널입니다.  제3호 PDF 다운로드 특집: 감각과 상상 그림의 인지심리학과 관찰의 이론적재성 강규태 가속기 감각하기 : 현장연구자의 민족지 연구 방법론에 대하여 김연화 기술은 어떻게 우리를 늙게 하는가? : '기술적 노화'와 돌봄의 STS 심은섭 케플러의 『꿈』, 달에 관한 광학 이론과 상상 장신혜 서평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 박윤지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 김은성, 『감각과 사물: 한국 사회를 읽는 새로운 코드』 손하늘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안유진 대학원생 이모저모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 강정섭 낯선 캠퍼스에서 새로운 공부와 익숙해지기 오수환 헌 신입생의 수기 이준영 2025 APPSA TAIWAN 경험기 이형석 첫 학술 발표, 설레었던 데뷔 무대 : 2025 APPSA 참여 후기 정원호 '왜' 이후의 질문을 기다리며 : 과학학과 연극반 블랙박스 제1회 공연 <학술원 보고> 연출 후기 공일환 SF 단편 <미확인> 구본진 부록 학과 소식 편집 후기

그림의 인지심리학과 관찰의 이론적재성(강규태)

특집: 감각과 상상


그림의 인지심리학과 관찰의 이론적재성


강규태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pineman@snu.ac.kr


1. 이론적재성의 인지심리학적 근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대로, 우리의 지식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여러 가지 별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에서 곰, 전갈, 오리온 등의 모습을 찾아낸다. 의사들은 X선 사진에서 일반인들은 찾기 힘든 병의 징후를 알아본다. 식물학자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풀들을 정확히 구별한다. 세포생물학자는 복잡한 구조들이 얽혀 있는 현미경의 상에서 세포소기관들을 찾아낸다. 반면 상황에 따라서는 배경지식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천체가 완전무결할 거라는 과거의 믿음은 태양의 흑점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플로지스톤 이론가는 연소하는 물체를 바라볼 때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볼 것이다.

관찰의 이론적재성 논제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의 과학철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재성 논제에 따르면, 과학자들 각자가 받아들이는 이론에 따라 관찰이 달라질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들은 같은 대상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관찰을 할 수 있다. 핸슨(Norwood Hanson)은 이론적재성 논제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 초기 논자 중 한 명으로, 그는 일출을 바라보는 지구중심설 지지자와 태양중심설 지지자의 사례를 든다(노우드 핸슨, 2007). 핸슨은 두 이론의 지지자가 서로 다른 시각 경험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구중심설 지지자는 떠오르는 태양을 행성으로서 보며 그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운동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반면 태양중심설 지지자는 태양을 항성으로서 보며 그것이 태양계의 중심에 있다고 볼 것이다.

이론적재성은 관찰의 역할과 객관성에 대해 커다란 함축을 지니기 때문에 오랜 기간 과학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론적재성 논제가 등장하기 이전의 과학철학자들은 관찰을 통해 얻은 증거가 어떤 이론을 입증 혹은 반증하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어떤 관찰 결과가 있다면, 그 관찰 결과가 한 이론을 얼마나 입증하는지, 그리고 그 이론을 다른 이론보다 얼마나 더 잘 입증하는지를 객관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찰이 이론과 독립적이므로 중립적인 판정 기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적재성 논제가 옳다면 관찰이 정말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불확실해진다. 과학자들이 같은 대상을 관찰하더라도 그것을 서로 다른 이론의 증거로 받아들인다면, 관찰은 이론들 사이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정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Churchland, 1985). 이론적재성이 작용하면, 똑같은 대상을 보면서도 A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는 그것이 A 이론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B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는 그것이 B 이론의 증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여기서 ‘보다’라는 말은 매우 애매하다. 어떤 의미에서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보고 있다. 즉, 그들은 지평선 위에 떠 있는 황색 원반을 보고 있다는 의미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대상을 한 명은 행성으로, 다른 한 명은 항성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동일한 시각 경험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관찰의 이론적재성은 시각 경험 자체의 차이라기보다 그 경험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이론적재성을 여러 수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천현득, 2020). 과학자가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과학자가 대상을 바라보면 그 대상의 색깔과 모양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양파를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면, 길쭉한 모양의 칸들로 나누어진 구조물과 각 칸마다 하나씩 들어있는 까맣고 동그란 알갱이들이 보일 것이다.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는 시각 경험의 수준이 ‘지각적 수준’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러한 시각 경험을 기반으로 해석과 추론 등 인지적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시각 경험에 나타난 작은 칸은 세포들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까맣고 동그란 알갱이는 세포핵이라고 해석한다. 해석과 추론이 이루어지는 수준이 ‘인지적 수준’이다. 그리고 과학자는 자신이 관찰한 것을 언어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양파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각 세포에는 핵이 하나씩 있다”와 같이 자신의 관찰을 기록할 수 있다. 이렇게 언어로 표현된 관찰 내용이 ‘언어적 수준’이다. 요약하면, 관찰은 과학자가 시각 경험을 하는 지각적 수준에서, 그 시각 경험에 대한 해석과 추론을 하는 인지적 수준을 거쳐, 그 결과를 언어로 나타내는 언어적 수준으로 나뉜다. 이 각각의 수준에 대해 이론적재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론의 영향을 받아 시각 경험이 변한다면 지각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 해석과 추론이 변한다면 인지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 표현하는 언어가 변한다면 언어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 작용한 것이다.

다시 일출을 보는 천문학자들의 예로 돌아가 보자. 두 천문학자가 서로 다른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지평선 위에 떠 있는 황색 원반을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지각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 작용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리고 한 명은 그것을 행성으로, 다른 한 명은 그것을 항성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지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은 작용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아마 두 사람은 각자의 관찰을 언어로 기록할 때 한 명은 ‘행성’이라는 용어를, 다른 한 명은 ‘항성’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므로 언어적 수준의 이론적재성도 작용할 것이다.[1] 

쿤(Thomas Kuhn)은 이론적재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과학사 사례를 소개한다(토머스 쿤, 2013: 10장). 몇 가지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천상계가 불변이라는 천문학 이론을 믿었던 서양인들은 신성(nova)이나 태양의 흑점 등 천체의 변화를 관측하지 못했으나, 그런 이론을 믿지 않았던 중국인들은 변화를 그대로 관측했다.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를 보았던 곳에서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보았다. 흔들리는 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낙하 운동을 보았지만 갈릴레오는 진자 운동을 보았다. 쿤은 ‘보다’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면 이 사례들이 모두 “다르게 본” 사례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구분한 다양한 수준을 적용하면, 각 사례는 서로 다른 수준의 이론적재성에 해당한다. 만약 천체의 변화를 서양인들이 아예 관측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지각적 수준의 차이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달리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 사이의 차이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갈릴레오 사이의 차이는 인지적 및 언어적 수준에서의 차이일 것이다.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출 이론적재성은 지각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이론에 따라 관찰 대상의 모양이나 색깔에 대한 시각 경험이 달라지는지가 이 글의 주제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 글에서는 ‘이론적재성’을 지각적 수준 이론적재성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겠다. 이론적재성이 정말로 존재하느냐의 문제는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신경과학·인지심리학 등 경험과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각자가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시각 경험이 달라진다는 주장은 단순히 사변적인 주장이 아니라, 우리 시각 체계(눈부터 뇌의 시각 담당 영역까지 이어지는 지각 및 인지 체계)가 실제로 이론의 영향을 받아 변화된 시각 경험을 산출한다는 주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론적재성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인지심리학 연구를 인용했고, 그 이후로도 이론적재성에 대한 논의는 인지심리학과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되었다(Bishop, 1992; Brewer, 2012; 2015; Churchland, 1988; Fodor, 1984; 1988; Pantazakos, 2021; Pylyshyn, 1999; Schurz, 2015; Stokes, 2015; Votsis, 2020). 특히, 많은 학자들이 이론적재성을 “지각의 인지적 침투(cognitive penetration/permeation of perception)”과 동일시해왔다(Raftopoulos, 2009: 119-120). 예를 들어 처칠랜드는 인지적 침투가 가능하므로 지각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 발생한다고 주장했고, 그에 반대해 포더는 인지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Churchland, 1988; Fodor, 1984; 1988. 그 밖의 다른 예로는 Lyons, 2011; Pylyshyn, 1999; Silins, 2016가 있다). 나는 이론적재성이 인지적 침투 외의 메커니즘으로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두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둘을 동일시하는 입장을 받아들이고 논의를 전개하겠다.[2]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그림을 볼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시각 현상들이 철학자들의 논의 대상이 되었다. 관찰은 주로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각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인지심리학적 현상들은 과학의 관찰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착시 현상은 실제 시각 자극과 지각자가 본 것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인데, 만약 착시가 이론의 영향을 받아 일어날 수 있다면 이는 이론적재성의 실재에 대한 한 가지 근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여러 논자들이 그림을 볼 때 나타나는 시각 현상들을 이론적재성의 존재를 입증 혹은 반증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다(이론적재성에 호의적인 입장으로는 토머스 쿤, 2013; 노우드 핸슨, 2007; Brewer, 2012; 2015; Churchland, 1988, 부정적인 입장으로는 Fodor, 1984; 1988; Raftopoulos, 2009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시각 현상들을 살펴보고 그 함의를 평가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그림들은 ‘착시(illusions)를 일으키는 그림’과 ‘게슈탈트 전환(gestalt shift)을 일으키는 그림’이다(여기서 논의되는 현상을 모두 통틀어서 ‘착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나눠서 논의하겠다). 나는 이 그림들을 볼 때 나타나는 시각심리학적 현상들이 그 자체로는 이론적재성을 입증하거나 반증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현상들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고 다시 평가하는 일은 이론적재성을 둘러싼 쟁점들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어지는 2절에서는 착시와 게슈탈트 전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살펴본다. 3절에서는 2절의 논의를 바탕으로 중요한 쟁점을 정리하고 각 쟁점에 대한 내 의견을 간략하게 제시한다.


2. 그림의 인지심리학

이 절에서는 이론적재성과 관련해 많이 논의되었던 그림들을 ‘착시를 일으키는 그림’과 ‘게슈탈트 전환을 일으키는 그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논의를 검토한다. 착시는 시각 체계에 내재되어 있는 보정 효과의 작용으로 나타나고, 게슈탈트 전환은 (주로) 주의(attention) 변화로 인해 나타난다.

2.1 착시

착시는 대상이 실제 모습과 다르게 시각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3]  착시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로 우리 시각 체계에 내재해 있는 보정 효과가 원래 작용해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나타나서 생긴다. 즉, 시각 체계는 복잡한 시각 자극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해서 우리의 시각 경험을 만드는데, 그러한 재구성 과정이 잘못 이루어질 때 착시가 나타난다(Gregory, 1997). 대표적인 착시로는 실제로는 동일한 길이의 선분이 서로 다른 길이로 보이는 ‘뮐러-라이어 착시(Müller-Lyer illusion)’가 있다.

그림 1. 뮐러-라이어 착시


[그림 1]에서 수평선의 길이는 같다. 그런데 수평선 양 끝에 달린 꺾쇠가 안쪽으로 향하는 위의 수평선이, 바깥쪽으로 향하는 아래의 수평선보다 길어 보인다. 이런 착시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우리 시각 체계에서 원근감을 보정하는 메커니즘이 작용해서 나타난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Gregory, 2005). 사람들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많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사는데, [그림 2]와 같이 그 선분에 연결된 꺾쇠가 안쪽을 향한 선분은 바깥쪽을 향한 선분보다 관찰자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선분은 가까이 있는 것에 비해 작아 보이므로 시각 체계에서는 연결된 꺾쇠가 안쪽을 향한 선분이 실제로는 겉보기보다 더 긴 것으로 보고, 이에 따라 더 길게 지각하도록 보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보정은 두 종류의 선분이 관찰자로부터 서로 다른 거리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같은 거리에 놓여 있을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면 두 선분의 길이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꺾쇠가 안쪽으로 향한 선분이 더 긴 것으로 보정되어 착시가 나타난다. 이러한 착시가 나타나는 이유에 대한 다른 가설도 존재하지만(e.g., Whitaker et al., 1996), 시각 체계의 보정을 원인으로 꼽는다는 점은 같다.

그림 2. 뮐러-라이어 착시의 발생이 원근감 보정 때문이라는 가설. (출처: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size constancy and the Muller-Lyer illusion. - Haley’s Portfolio Project)


비슷한 예로 ‘폰조 착시(Ponzo illusion)’라고 불리는 [그림 3]이 있다. 이 그림의 두 수평선은 실제로는 길이가 똑같지만, 위에 있는 선분이 더 길어 보인다. 이 착시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가설도 뮐러-라이어 착시와 유사하다. 두 개의 선분이 위로 갈수록 점점 가까워지는데, 이는 평행한 선분이 시야 저 너머로 뻗어 있을 때 원근법에 의해 점점 모여 보이는 상황과 비슷하다(멀리 뻗어 있는 기찻길을 생각해 보자). 그래서 시각 체계에서는 위쪽의 수평선이 더 멀리 있는 것으로 인식되므로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림 3. 폰조 착시


여러 학자가 이러한 착시들이 이론적재성의 사례라고 주장한다. 시각을 통해 관찰한 대상에 대한 보정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은 경험에서 형성한 일종의 이론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뮐러-라이어 착시는 ‘꺾쇠가 안쪽을 향하는 선분이 실제로는 보이는 것보다 더 길다’라는 이론이 우리 시각 체계에 영향을 미쳐 그러한 선분을 더 길게 보이도록 하는 현상이다(Fodor(1984)는 Gregory(1970)의 주장을 이론적재성과 관련하여 이와 같이 해석한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해, 포더(Jerry Fodor)는 뮐러-라이어 착시가 오히려 이론적재성에 대한 반례라고 주장한다(Fodor, 1984). 우리가 [그림 1]에서 두 수평선의 길이가 같다는 점을 알게 되어도 착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즉, 우리가 새로운 이론(‘두 수평선의 길이는 같다’)을 받아들였음에도, 시각 경험이 변하지는 않는 것이다. 반면 처칠랜드(Paul Churchland)는 착시가 이론적재성의 사례가 맞다고 다시 반론한다(Churchland, 1988). 우리 시각 체계는 고정된 게 아니라 학습·훈련·경험 등으로 신경 연결성이 변하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띠고 있다. 특정 이론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훈련받고 학습하면, 시각 체계의 신경 연결이 변하는 과정을 통해 이론적재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처칠랜드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포더는, 만약 정말로 장기간에 걸쳐 신경 연결이 변화한다면 이론적재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성인이 된 후 그런 가소성이 나타난다는 증거는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Fodor, 1988). 정리하자면, 포더와 처칠랜드는 이러한 착시 사례에서 이론이 시각 경험에 즉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이론의 영향으로 장기간에 걸쳐 시각 체계 자체가 변하여 ‘통시적으로’ 이론적재성이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포더와 처칠랜드의 논쟁 이후로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신경가소성에 대한 증거는 더 많이 축적되었다(관련 연구들의 리뷰로는 De Weerd et al., 2006; Gilbert et al., 2001; Montgomery et al., 2022 참고). 따라서 둘 사이의 논쟁만 놓고 보면 처칠랜드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프토풀로스(Athanasios Raftopoulos)는 신경가소성으로 인해 시각 경험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이론적재성으로 간주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Raftopoulos, 2009). 라프토풀로스는 이론이 시각 경험의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야 이론적재성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신경가소성으로 인한 변화는 이론 그 자체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이론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관찰 과제의 영향이다. 다시 말해, 이론과 상관없이 특정 관찰 과제를 수행하면 시각 체계가 그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라프토풀로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지구중심설에서는 금성의 위상 변화가 불가능하지만, 태양중심설에서는 가능하다. 라프토풀로스의 입장에서 만약 지구중심설의 지지자가 태양중심설로 생각을 바꿀 때 금성의 위상 변화가 바로 감지된다면 이론적재성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 중 어느 것을 받아들이는지에 상관없이, 그저 위상 변화를 관측하는 훈련을 따로 받는다고 해도 위상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시각 경험의 변화는 태양중심설이라는 이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훈련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이론적재성의 사례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라프토풀로스의 주장이다.

착시가 이론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다른 근거로는 무형 완성(amodal completion) 현상이 있다. 무형 완성이란 무언가에 가려지거나 일부분이 비어 있는 물체를 볼 때도 완성된 모양으로 보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림 4]를 보자. 실제로는 삼각형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마치 그림 한가운데에 흰색 삼각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부분에까지 마치 윤곽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은 언뜻 보기에는 우리가 삼각형이 있을 거라는 ‘이론’이 시각 경험에 영향을 미쳐서 삼각형을 보게 하는 것 같다.

그림 4. 삼각형 무형 완성


그러나 필리신(Zenon Pylyshyn)은 오히려 무형 완성은 시각 체계가 이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근거라고 주장한다(Pylyshyn, 1999). [그림 5]를 보자. 가운데의 그림과 같이 선이 가려져 있을 때, 가려진 부분을 들춰내면 왼쪽 그림과 같은 팔각형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오른쪽과 같은 모양보다는 팔각형을 훨씬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운데 그림을 볼 때, 실제로는 마치 오른쪽 도형이 가려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믿는 ‘이론’에서는 왼쪽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시각 체계는 오른쪽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필리신은 이 점이 착시 현상이 이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즉, 시각 체계는 그 나름의 내재된 논리를 따를 뿐, 이론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Kanizsa, 1985; Kanizsa & Gerbino, 1982; Pylyshyn, 1999).

그림 5. 카니자 무형 완성. 이 그림은 필리신이 Kanizsa(1985)에서 인용한 것인데, 원본은 오른쪽 그림이 왼쪽 그림과 같다. 설명을 위해서 오른쪽 그림을 내가 변형했다.


2.2 게슈탈트 전환

‘게슈탈트’는 독일어로 단순히 ‘형태’를 의미하지만, 인지심리학에서는 단순한 요소들이 조직화해 나타나는 전체적인 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그림 6]은 각 요소로 보면 흰색 혹은 검은색 원들이 나열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흰색 원들이 조직화한 ‘기둥’과 검은색 원들이 조직화한 ‘기둥’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때 각각의 ‘기둥’을 게슈탈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림 6. 기둥 게슈탈트


소위 ‘애매한 그림(ambiguous figures)’은 동일한 그림을 두 가지 이상의 게슈탈트로 볼 수 있다. [그림 7]의 오리-토끼 그림은 애매한 그림의 대표적인 예이다. 오리-토끼 그림은 왼쪽의 기다란 두 개의 돌기가 부리에 해당하는 오리로 보이기도 하고, 귀에 해당하는 토끼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돌기와 눈, 머리 모양 등을 어떻게 조직화해서 보느냐에 따라 오리 게슈탈트로 보이기도 하고 토끼 게슈탈트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 7. 오리-토끼 그림


게슈탈트 전환이 일어나는 애매한 그림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는 [그림 8]의 네커 큐브(Necker cube)이다. 네커 큐브도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게슈탈트로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오른쪽 그림에 표시한 면이 앞으로 나와 있는 정육면체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그 면이 뒤에 있는 정육면체로 보는 것이다.

그림 8. 네커 큐브


애매한 그림을 다른 게슈탈트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모르면 게슈탈트 전환이 쉽지 않다. [그림 7]을 오리로만 본 사람은 토끼로 보는 방법을 모를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이 그림의 두 돌기를 토끼의 귀로 볼 수 있고, 머리 오른쪽에 살짝 들어간 부분을 토끼의 입으로 볼 수 있다고 가르쳐주면 이 그림을 토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이 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오리이다’, ‘토끼이다’)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어떤 게슈탈트를 볼 수 있는지가 달라진다. 그래서 여러 학자는 애매한 그림을 볼 때 나타나는 게슈탈트 전환을 이론적재성의 근거로 간주한다(토머스 쿤, 2013; 노우드 핸슨, 2007; Brewer, 2012; 2015; Churchland, 1988). 핸슨은 우리가 시각 경험을 할 때 각각의 요소를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게슈탈트로 묶어서 본다는 점에서 시각 경험과 해석이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네커 큐브의 선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다음에 두 가지 정육면체 게슈탈트 중 하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노우드 핸슨, 2007: 28-30). 우리는 네커 큐브를 둘 중 하나의 게슈탈트로 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능동적 해석도 개입하지 않는다. 네커 큐브에 대한 이론과 해석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보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쿤은 게슈탈트 전환이 패러다임 전환의 원형(prototype)이라고 말한다(토머스 쿤, 2013: 210). 패러다임 전환으로 인해 과학자들이 세상을 다르게 보는 일이 근본적으로는 게슈탈트 전환과 유사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과학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과학자 공동체 구성원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게슈탈트를 보는 훈련을 받아야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또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학혁명 시기에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게슈탈트를 볼 수 있도록 시각 학습을 다시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 쿤은 게슈탈트 전환을 패러다임 전환기에 나타나는 과학자들의 시각 변화와 완전히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게슈탈트 전환에 대한 인지심리학 실험들은 과학자들이 실제로 행하는 세심하고 통제된 관찰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은 과학자들의 지각 변화에 대한 근거는 이러한 심리학 실험 결과로는 충분치 않고, 과학사에서 실제로 과학자들의 시각 경험이 변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례들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토머스 쿤, 2013: 212-214, 몇 가지 예시를 이 글의 1절에서 소개했다). 그럼에도 쿤이 이러한 심리학적 근거를 여러 가지 인용하며 패러다임 전환의 원형이라고 본 것이나, 『과학혁명의 구조』 이후의 작업에서도 과학적 변화를 설명하는 자신의 이론을 인지심리학 연구를 통해 뒷받침하려고 한 것(Kuhn, 1974; 2022)을 볼 때, 인지심리학적 근거들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은 확실하다.

좀 더 최근의 브루어(William Brewer)는 애매한 그림에서 사람들의 지식이나 기대에 따라 서로 다른 게슈탈트를 볼 수 있다는 심리학 실험들을 인용한다(Brewer, 2012; 2015). [그림 9]는 젊은 여성의 옆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노파의 얼굴로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브루어가 인용하는 연구에 따르면, 이 그림과 비슷하지만 훨씬 노파 같아 보이는 그림을 먼저 보고 [그림 9]를 보여주자 97%의 피험자가 노파를 봤으며, 마찬가지로 젊은 여성 그림을 먼저 본 경우 100%의 피험자가 젊은 여성을 보았다고 한다(Leeper, 1935).

그림 9. 노파/젊은 여성 그림


앞의 실험은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 다시 애매한 그림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에 이론이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그저 시각 체계가 이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그림을 더 잘 탐지한 사례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브루어는 다른 실험을 인용하며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림 10]은 왼쪽 상단의 두 개의 동그라미가 귀에 해당하는 쥐로 보이기도 하고, 그 동그라미가 안경에 해당하는 대머리 중년 남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그림을 이용한 실험(Bugelski & Alampay, 1961)에서 쥐도 사람도 아닌 동물 그림들을 보여줬을 때, 피험자들이 이 그림에서 쥐를 볼 확률은 97%에 달했다. 직접적으로 쥐 그림을 보여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결과는 단순히 비슷한 그림을 잘 찾아낸 사례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전에 보여준 그림들을 ‘비인간 동물’이라는 범주로 분류하고, 애매한 그림이 나왔을 때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대상(쥐)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브루어는 이 실험이 이론(‘제시되는 그림들은 비인간 동물이다’)이 시각 경험에 영향을 준 사례라고 해석한다.

그림 10. 쥐/중년 남성 그림


애매한 그림과 비슷하게, 게슈탈트 지각과 밀접하게 관련된 그림으로 파편화된 그림(fragmented figures)이 있다. 파편화된 그림은 언뜻 보기에 불규칙한 얼룩에 불과하지만, 특정 얼룩들을 잘 보면 특정한 대상의 게슈탈트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림 11]은 모르고 보면 흰 배경에 불규칙한 검은 얼룩들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 오른쪽 가운데 부분의 점들을 잘 보면 달마티안 개의 게슈탈트가 나타난다.

그림 11. 달마티안 그림


브루어는 애매한 그림과 유사한 이유로 파편화된 그림도 이론적재성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피험자들에게 [그림 12]와 같이 다양한 파편화된 그림을 보여줄 때, 그 전에 무언가 정보를 주었다면 그런 정보가 전혀 없었을 때보다 특정 대상을 볼 가능성이 컸다. 그림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았을 때는 원본 그림에 어떤 대상이 포함되어 있는지 맞힐 확률이 9%에 불과했지만, 무언가 의미 있는 그림이라는 힌트를 주었을 때는 그 대상을 찾아낼 확률이 55%로, 그 대상이 속한 범주 정보를 주었을 때는 74%로 늘어났다(Reynolds, 1985). 그래서 브루어는 파편화된 그림도 이론적재성의 존재를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림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이론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관찰자가 그 대상의 게슈탈트를 볼 가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림 12. 파편화된 그림의 다양한 예(Reynolds, 1985)


그림을 볼 때 나타나는 게슈탈트 전환이 이론적재성의 증거라는 주장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은, 그러한 전환이 이론에 의해 나타난다기보다는 단지 시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위치가 달라져서 나타난다는 것이다(대표적으로 Fodor, 1988; Pylyshyn, 1999. 또한, 이론적재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맥락은 아니지만, Connolly(2014)와 Price(2009)도 시각 경험의 변화를 주의 위치 변화로 설명한다). [그림 7] 오리-토끼 그림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 그림을 오리 게슈탈트로 볼 때 사람들은 오리의 부리 부분의 선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이 토끼의 귀라고 보기에는 너무 반듯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토끼 게슈탈트로 볼 때 사람들은 머리의 오른쪽 부분에 살짝 들어간 홈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이 토끼의 입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래서 Wittgenstein(1953)은 오리 게슈탈트로 볼 때 이 입 부분이 무의미해진다고 말한다). [그림 11] 달마티안 그림도 다시 보자. 달마티안 게슈탈트를 찾지 못할 때는 이 흩뿌려진 수많은 얼룩에서 도대체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달마티안 게슈탈트를 볼 줄 알게 되는 것은 달마티안의 머리, 몸통, 다리에 해당하는 얼룩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이다.


3. 각 쟁점에 대한 평가

앞 절의 논의에서 나타나는 쟁점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시각 체계에 내재된 보정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2) 시각 체계가 신경가소성으로 인해 변하는 것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3) 게슈탈트 전환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전반적으로 나는 이 그림들을 볼 때 나타나는 착시나 게슈탈트 전환이 이론적재성의 증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그림들을 둘러싼 논의는 이론적재성과 관련해 위의 세 가지 쟁점에 대한 여러 가지 통찰을 준다. 이제 위 쟁점 각각에 대해 찬/반 입장을 간략하게 다시 정리하고, 내 입장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시각 체계에 내재된 보정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 그렇다: 시각 체계에 내재된 보정은 세계에 대한 이론이 시각 체계에 영향을 주어 생기기 때문에 이론적재성의 사례이다(Churchland, 1988).

- 아니다: 착시는 세계에 대한 이론을 바꾸어도 사라지지 않는다(Fodor, 1988). 또한, 이론이 시각 경험마다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각 체계 자체의 구조 때문이므로 이론적재성이라고 할 수 없다(Raftopoulos, 2009).

- 내 의견: 나는 착시가 나타난다는 점은 이론적재성의 증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론적재성은 무엇보다도 과학 이론의 영향을 받아 지각 경험이 변하는 현상을 뜻하는데, 지각 체계에 내재되어 착시를 일으키는 ‘이론’은 과학 이론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예를 들어 뮐러-라이어 착시([그림 1])를 일으킨다고 알려진 ‘꺾쇠가 안쪽으로 향하는 선분은 보이는 것보다 크다.’ 같은 ‘이론’은 이론적재성 논제에서 말하는 과학 이론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학 이론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적어도 세계에 대한 단순한 믿음보다는 체계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과학 이론의 구조에 대한 리뷰로는 Craver, 2002; Winther, 2021 참고).

둘째, 설령 시각 체계에 내재된 ‘이론’이 과학 이론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착시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론적재성의 사례가 될 수 없다. 이론적재성 논제가 과학철학자들의 주목을 끈 이유는 그것이 서로 다른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들 간에 관찰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론 하에서 과학 활동을 하는 과학자들이 같은 대상을 관찰하면서도 다르게 본다면, 관찰이 두 이론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판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점은 또한 패러다임 간 비교가 어렵다는 공약불가능성 논제로 이어진다.[4]  그런데 시각 체계에 이론이 내재되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동일한 착시가 광범위하게 나타날 것이다(Fodor, 1988). 따라서 설령 착시가 ‘이론’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관찰의 역할이나 공약불가능성에 대해 별다른 함축이 없는 사소한 의미의 이론적재성일 뿐이다.

(2) 시각 체계가 신경가소성으로 인해 변하는 것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 그렇다: 특정한 이론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인 훈련을 받으면 시각 경험이 변화할 수 있다. 착시는 그러한 훈련이 시각 체계가 특정 방식으로 발달하도록 만들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Churchland, 1988).

- 아니다: 특정 이론에 따른 훈련으로 시각 체계가 변화하더라도, 그것은 이론적재성의 사례가 아니다. 시각 체계의 변화는 이론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꼭 그 이론과 연관될 필요는 없는 훈련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Raftopoulos, 2009).

- 내 의견: 이 쟁점에서 나는 ‘그렇다’ 쪽에 손을 들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짚고 넘어갈 점은, 우선 특정 이론에 따른 장기간의 반복 훈련으로 인한 시각 체계의 변화를 현재는 양 진영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를 ‘이론적재성’이라고 인정하느냐이다. 이 문제는 똑같은 현상을 두고 단순히 ‘이론적재성’이라고 부르냐 마느냐 하는 용어상의 논쟁이 아니다. 이 문제는 이론이란 무엇인지, 이론적재성이란 무엇인지와 같은 실질적인 쟁점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 논의의 방향을 거꾸로 하여 이론적재성에 어떤 함축이 있어야 흥미로운 현상일지 생각해 보고, 그러한 함축이 있기 위한 이론적재성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론적재성이 중요한 이유는 이론적재성이 과학자들 간에 관찰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이론에 의해 과학자들의 관찰이 달라지긴 했는데, 그럼에도 서로 다른 이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이 서로 문제없이 관찰 내용에 대해 합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별로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신경가소성으로 인한 시각 경험의 변화는 충분히 흥미로운 수준의 이론적재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할까? 나는 다른 논문에서 인지신경과학 연구를 인용해 그렇다고 주장한 바 있다(강규태, 2024). 시각 자극에서 특정한 속성을 지각하는 훈련을 거치면 방향 변별, 깊이 감지, 거리 감지 능력이 향상되며, 그것은 신경 연결의 변화로 나타난다(포괄적인 리뷰로 De Weerd et al., 2006; Gilbert et al., 2001; Montgomery et al., 2022 참고). 따라서 서로 다른 이론에 따라 관찰 훈련을 받은 과학자는 같은 대상을 관찰하면서도 지각할 수 있는 속성이 다를 수 있다. 물론 이런 추론은 원리적인 것이고, 실제 과학 활동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더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쿤이 말했듯이 과학 활동에서 시각적 수준의 이론적재성이 발생하는지는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통제된 실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확실하게 알기 힘들 것이다(토머스 쿤, 2013: 212-213). 따라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관찰에 대한 불일치가 존재한 사례를 찾고, 그것이 시각 경험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한 가지 가능한 후보는 쿤이 이론적재성의 예로 들었던 동서양 천문학의 차이이다. 쿤은 서양인들은 천상계가 불변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태양의 흑점이나 신성의 출현을 관측하지 못했지만, 중국인들은 그런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관측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토머스 쿤, 2013: 216-217).[5]  다른 사례는 브루어가 든 것으로(Brewer, 2012; 2015), 프랑스 물리학자 블롱들로(Prosper-René Blondlot)가 1903년에 발견했으나 결국 착각으로 밝혀진 N선(N-rays)의 사례이다. 블롱들로의 발견 이후 N선의 특성에 대해 300편이 넘는 논문이 나왔는데, 그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나왔다. 반면 미국, 영국, 독일 등 프랑스 외의 물리학자들은 N선의 발견을 재현할 수 없었다. 블롱들로가 발견을 의도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랑스 내에서는 재현 실험들이 나오기도 했고, 블롱들로는 회의론자들이 자신의 실험실에 들어와 검사를 하는데도 협조적이었으며, 결국 N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다수 과학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N선을 관찰하기 위한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다는 것이다. N선을 관찰하길 원하는 관찰자들은 훈련을 받아야 했다. 우선, 어둠에 적응해야 했고, 망막의 주변부 간상세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검출기의 측면을 바라봐야 했다. 아마도 이러한 훈련의 결과로 프랑스의 물리학자들은 N선이 아니더라도 다른 시각 자극에 훨씬 민감해졌을 것이다. 반면 다른 나라의 물리학자들은 블롱들로의 실험실에 방문해 같은 조건에서 관찰하고자 했음에도, 필요한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해 그러한 시각 자극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사례가 신경가소성에 의한 이론적재성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게슈탈트 전환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 그렇다: 그림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에 대한 지식에 따라 게슈탈트 전환이 일어나는 일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이다.

- 아니다: 게슈탈트 전환은 주의를 기울이는 위치의 변화에 불과하며, 믿고 있는 이론에 따른 변화가 아니다.

- 내 입장: 나는 애매한 그림이나 파편화된 그림을 볼 때 나타나는 게슈탈트 전환이 이론의 영향에 의해 지각이 바뀌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의 변화로 인한 것이라는 쪽을 지지한다. 따라서 이러한 그림들은 이론적재성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그림들을 볼 때 나타나는 일회적이고 가역적인 주의 변화가 아니라, 유사한 관찰 대상들에서 일관적으로 특정 게슈탈트를 볼 수 있는 주의 능력으로 인해 이론적재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애매한 그림이나 파편화된 그림이 이론적재성의 증거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러한 그림들에서 다른 게슈탈트를 보는 일은 앞서 말한 사소한 이론적재성에 해당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이론적재성이 충분히 흥미로운 현상이라면 과학자들 사이에 관찰 결과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이런 그림에서 나타나는 게슈탈트 전환의 경우, 단순히 주의를 기울이는 위치를 바꿈으로써 일어난다. 오리-토끼 그림([그림 7])의 경우, 처음에는 토끼만 보더라도 오리로 보는 법을 배우면 그 뒤로는 오리와 토끼 사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다. 오리로 보는 사람과 토끼로 보는 사람이 서로 대화하면서, 오리로 보는 사람은 토끼로 보는 사람에게 어디어디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면 토끼로 보는 사람도 결국 오리로 볼 수 있게 된다. 파편화된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어디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그것을 무엇으로 봐야 하는지 알려주면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던 물체를 볼 수 있게 된다. 만약 서로 다른 두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가 같은 대상에서 서로 다른 게슈탈트를 볼지라도, 한 과학자가 다른 과학자에게 주의를 어디에 기울여야 하는지 안내해 준다면 다른 과학자도 충분히 그 게슈탈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게슈탈트 전환 현상은 그 자체로는 이론적재성의 증거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주의 변화가 이론적재성의 한 가지 메커니즘일 수 있다고 본다(강규태, 2024). 코놀리(Kevin Connolly)에 따르면 주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Connolly, 2014). 한 가지는 ‘단순 주의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특별한 훈련 없이도 가능한 것으로, 특정 측면에 일회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X선 사진을 화면에 띄워놓고, 의사가 환자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 모양이 초기 종양이다’라고 말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환자는 의사가 그렇게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그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몰랐겠지만, 어쨌든 의사의 안내에 따라 그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가능하다. 이와 달리, 다른 한 가지는 ‘주의 능력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같은 유형의 사례에서 일관적으로 같은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을 습득한 것이다. 이 경우 특정 사례에서 일회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례들을 보더라도 같은 측면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주의 능력 변화는 장기간에 걸친 반복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의 예에서 환자는 의사의 안내를 받아 살펴본 X선 사진이 아닌, 다른 X선 사진들을 혼자 보게 되면 어느 부분이 종양인지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 의사는 다른 X선 사진들에서도 종양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주의 변화의 구분은 무엇이 진정한 이론적재성인지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단순 주의 변화의 경우, 특정 이론의 지지자더라도 적절한 지도를 받기만 하면 다른 이론 지지자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단순 주의 변화는 이론적재성에 의한 의견 불일치를 발생시킨다고 보기 힘들다. 애매한 그림이나 파편화된 그림에서의 게슈탈트 전환은 여기에 속한다. 반면 주의 능력 변화가 일어나면, 과학자들은 지속적으로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이론은 자연의 서로 다른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이론 하에서 훈련받은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주의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같은 관찰 결과를 두고도 서로 다른 측면에 주의를 맞추어 서로 다른 시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론하에 훈련받고 그러한 능력을 습득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기 어렵다. 따라서 서로 다른 이론을 지지하고 그 전통 하에 훈련받은 과학자들은 관찰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우연히 혹은 적절한 지도로 다른 측면에 일회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단순 주의 변화에 불과하며 지속적으로 관찰이 달라지는 주의 능력 변화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4. 결론

이 글에서 나는 착시나 게슈탈트 전환을 일으키는 그림들이 관찰의 이론적재성 논제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내 입장은 일차적으로는 부정적이다. 이런 그림들에서 착시를 일으키거나 게슈탈트 전환을 일으키는 ‘이론’은 과학 이론이라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또한, 그러한 ‘이론’이 과학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변화는 이론적재성이라기에는 너무 사소하다. 그리고 시각 경험의 변화를 단순 주의 변화로 설명 가능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런 그림들이 일으키는 착시나 게슈탈트 전환은 이론적재성의 근거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그림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중요한 쟁점을 명료화할 수 있었다. 해당 쟁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시각 체계에 내재된 보정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2) 시각 체계가 신경가소성으로 인해 변하는 것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3) 게슈탈트 전환은 이론적재성의 사례인가? 또한 나는 특정 이론에 따른 교육 및 훈련의 영향으로 시각 체계 자체가 변하거나, 단순 주의 변화가 아닌 주의 능력 변화가 일어나면 이론적재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 사실, 핸슨은 지각과 해석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핸슨에 따르면, 지평선 위에 떠 있는 황색 원반을 시각 경험한 뒤에 그것을 태양이라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황색 원반을 보는 것이 곧 그것을 태양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시각 경험에는 어떤 대상을 쳐다볼 때 그것의 모양과 색깔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도 한꺼번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2] 인지적 침투와 이론적재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현재 작성 중인 박사논문에서 다룬다.

[3]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시각 경험은 대상의 실제 모습과 다르다. 우리 시각 체계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각 경험이 대상의 실제 모습과 현저하게 다른 경우는 존재하고, 그런 경우가 착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공약불가능성과 관련해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는 패러다임 간 합리적 비교가 거의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지만(토머스 쿤. 2013), 이후의 논문들에서는 다소 완화된 입장을 취한다(Kuhn. 1977; 1982).

[5] 이 사례는 서양인들이 흑점이나 신성을 천상계의 변화가 아닌 기상 현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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