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감각과 상상
기술은 어떻게 우리를 늙게 하는가?: '기술적 노화'와 돌봄의 STS
심은섭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졸업생
2026년 석사과정 졸업
slouie1104@snu.ac.kr
1. 서론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은 사회의 근간을 바꾸는 거대한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정 분야의 성과를 넘어, AI는 경제, 문화, 정치 등 사회 전반의 운영 방식을 재편하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을 급격히 가속화한다. 이러한 거대한 기술적 변동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편의와 생산성 향상을 약속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술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들을 배제하며 깊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기술이 본래 지니는 양면성, 즉 유토피아적 기대와 디스토피아적 불안이 AI 시대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사회적 긴장과 저항을 유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현상이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공동체의 안전과 풍습을 위협하는 ‘괴물’로 여겨져 파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Kline & Pinch, 1996). 컴퓨터의 확산은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테크노스트레스(Technostress)’라는 현대적 질병을 안겨주었다(Brod, 1984).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전환은 과거의 기술 변화와는 그 속도와 범위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특히, 과거의 테크노스트레스가 주로 ‘직무 환경’에서의 적응 문제를 다뤘다면, 현재의 디지털 전환은 상점에서의 주문, 은행 업무, 교통편 예매, 공공 서비스 이용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며,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곧 생존의 위기로 직결시킨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가장 가시적인 단면이 바로 ‘키오스크’의 확산이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2017년 시간당 6,470원에서 2019년 시간당 8,350원으로 2년 만에 29.1% 인상되었다(최저임금위원회). 이에 고용주들은 아르바이트 고용을 줄이고 키오스크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며, 무인 주문 및 결제 시스템이 식당, 카페, 영화관 등을 빠르게 점령했다(조선일보, 2019. 10. 28.). 그러나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에 실패하는 노년층의 모습은 단순히 하나의 기계에 대한 부적응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디지털 전환이 효율성과 비용 절감이라는 가치를 우선하며, 특정 세대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기차표 온라인 예매 할당제로 인해 명절에 고향을 찾기 어려워지고(경향신문, 2019. 03. 02.), 비대면 거래에 익숙하지 않아 더 비싼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는 소위 말하는 ‘노인세(稅)’의 등장(조선일보, 2021. 06. 16.)은 이러한 배제가 겪는 불편함을 넘어 구체적인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년층의 고립과 소외는 단순히 개인적인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다. 이 글은 이러한 현상을 새로운 사회 기술적 질서에 참여할 능력을 박탈당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기술적 노화(technological aging)’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는 생물학적 나이 듦을 넘어, 기술 변화의 속도가 개인의 적응 능력을 초월할 때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노화 현상이다. 나아가, 이는 민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기회로부터 멀어지는 ‘기술적 시민권(technological citizenship)’의 위기로도 이어진다. 지금까지 과학기술학(STS)에서 노인과 기술의 관계는 주로 돌봄 로봇과 같은 보조 기술의 관점에서 다루어져 왔다.[1] 그러나 기술적 배제가 시민권의 문제와 직결되는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를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기술적 노화’와 ‘기술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AI 시대의 디지털 전환이 야기하는 사회적 배제와 불평등의 문제를 과학기술학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2절에서는 이 글의 분석틀이 될 돌봄의 STS, 행위자-연결망 이론, 사회세계와 경계물 이론, 그리고 사회기술적 상상을 검토한다. 3절에서는 노인학의 논의를 통해 ‘나이 듦’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 살펴보고, 4절에서는 기술과 나이 듦의 공구성(co-constitution) 관계를 다룬 선행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5절에서는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기술적 노화’ 현상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이것이 갖는 정책적, 과학학적, 민주주의적 함의를 도출한다. 마지막으로 6절에서는 전체 논의를 요약하고 후속 연구의 방향을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앞선 1절에서 제기한 기술적 노화와 기술적 시민권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본 절에서는 과학기술학의 핵심적인 이론적 도구들을 검토한다. 이 이론들은 디지털 전환이라는 현상을 단일한 시각이 아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먼저 ‘돌봄의 과학기술학’은 기술적 배제와 소외의 문제를 윤리적·정치적 ‘돌봄’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렌즈를 제공한다. 다음으로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은 디지털 전환이 특정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권력 과정임을 ‘번역’의 개념을 통해 분석하는 도구를 제공한다. 또한, ‘사회세계와 경계물 이론’은 서로 다른 경험과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키오스크와 같은 기술적 대상을 둘러싸고 어떻게 충돌하고 단절되는지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돌봄의 과학기술학이 기존의 돌봄 윤리와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은 “실무에서의 돌봄(care in practice)” 관점이 등장하면서이다. 페미니스트 돌봄 윤리는 기존의 원리 위주 의학 윤리에 대한 대안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초반쯤 관계적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면서 등장했다(Lindén & Lydahl, 2021). 이전에 돌봄은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자녀를 보살피는 엄마, 환자를 간호하는 간호사, 집을 돌보는 주부 등의 이미지가 강했다. 이후 좋은 돌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등장했고 규범적인 돌봄 윤리가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의 대칭성 원칙을 바탕으로 연구자가 선험적으로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돌봄인지 정의하지 않고 실무에서 무엇이 좋은 돌봄인지를 상황에 따라서 살피는 경험적 돌봄 윤리가 제안되었다. 이에 따르면, 좋은 돌봄이란 구성적인 것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Pols, 2008; Lindén & Lydahl, 2021).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과학기술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을 우려물(matter of concern)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Latour, 2004). 이는 기존의 비판적 사회과학이 물질을 사실물(matter of fact)로 바라보려고 하며 사실에서 가치를 엄격하게 배제하려 했으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에 대한 반발에 기인한다(하대청, 2019).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마리아 푸이그 드 라 벨라카사(Maria Puig de la Bellacasa)는 라투르가 말한 우려물을 돌봄물(matter of care)로 다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돌봄을 윤리적, 정치적 문제로 간주하며 계층화된 세계에서 배제로 이루어지는 권력 역학을 비판했다(de la Bellacasa, 2011).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돌봄물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반응을 통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주변화된 무시받는 존재를 우선적인 대상으로 삼으려고 한다(하대청, 2019). 성형 수술은 기존의 페미니스트 과학의 관점에서는 외부에 의해서 설정된 미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수술하는 탈식민주의적 시각이나, 자신의 주도적인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돌봄의 관점에서 한국의 과학기술학자 임소연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임소연은 수술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수술 전후의 상담, 회복 과정까지 포함하여 성형 수술을 세 단계로 나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참여하는 다양한 여성 노동자들의 돌봄 기여에 관해 확인한다. 이들은 환자의 신체와 관련해서 발생하는 ‘수술 불안’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불안은 환자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술을 진행하는 의사 역시 갖는 것이다. 즉, 기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상담자, 간호사들의 역할에 대해 재조명하고 이들이 수술 불안을 해소하는 돌봄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밝힌 것이다(Leem, 2016). 이러한 돌봄의 관점은 본 연구의 핵심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Leem(2016)이 ‘수술 불안’을 해소하는,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을 가시화했듯이, 이 글은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노년층이 겪는 ‘기술 불안(technological anxiety)’과 소외의 문제를 개인의 부적응으로 치부하는 대신, 우리 사회가 주목하고 해결해야 할 ‘돌봄이 필요한 문제(a matter of care)’로 전환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즉, 드 라 벨라카사의 주장처럼, 기술적 배제라는 정치적 문제를 돌봄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Callon(1986), Latour(1987), Law(1987)에 의해 개발된 개념으로, 테크노사이언스를 더 크고 강력한 네트워크의 형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이는 비인간 행위자 역시 네트워크에 포함시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동맹을 맺는 대상으로 포함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정치 이론과 차이가 있다(Sismondo, 2004). 행위자(actor)란 행위를 하는 실체를 의미한다(Latour, 1992).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는 행위자가 이미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존재하게 되기까지 겪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행위자들은 더 많은 요소와 묵시적이거나 명시적인 동맹을 맺을수록 강한 행위자가 된다(김환석, 2009). 연결망이란 그 성격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실체들 사이 비구체화된 관계들의 집합을 뜻한다(Callon, 1993). 행위자와 연결망은 서로가 서로를 구성한다. 행위자는 연결망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연결망은 행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Callon & Latour, 1981). 한편, 매개자는 행위자를 매개하여 연결망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매개자는 텍스트, 기술적 인공물, 지식, 화폐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Callon, 1992). 또한 동일한 실체가 동시에 행위자와 매개자 모두가 될 수 있다. 두 개념은 귀속(attribution) 메커니즘을 통해 구분할 수 있다.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매개자가 특정 행위자에 귀속되게 된다. 따라서 행위자는 매개자를 생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김환석, 2009). 번역(translation)은 ‘어떤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를 대신해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만드는 모든 행동을 지칭’한다(김환석, 2009). 번역은 4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질 수 있다(Callon, 1986). 먼저 문제화(problematization) 단계는 행위자가 담론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제안하는 행위를 말한다. 문제화에 성공하면 해당 행위자는 연결망 내에서 의무통과지점(OPP; obligatory passage point)이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다음은 이해관계 부여(interessement) 단계다. 문제화에 성공한 후 해당 문제를 겪는 행위자를 다른 연결망과 분리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다른 연결망의 권력을 약화시킨다. 세 번째 단계는 가입(enrollment)이다. 연결망 내 행위자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이를 연결망 내의 행위자가 수락하여야 동맹이 실현되고 공고화된다. 마지막은 동원화(mobilisation) 단계이다. 소수의 행위자가 자신이 속한 연결망을 대표하게 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서 발언의 권한을 위임받는 과정을 말한다. 즉, 이전에는 움직이지 못했던(immobile) 대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mobilise)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ANT의 ‘번역(translation)’ 개념은 디지털 전환 과정이 결코 중립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님을 보여주는 강력한 도구다. 기업, 개발자, 정부 등의 특정 집단이 키오스크나 AI 시스템을 사회 운영의 필수통과지점으로 설정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노년층)의 대면 서비스, 현금 결제 등의 기존 연결망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권력의 작동 방식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기술적 노화’는 바로 이 번역 과정에서 배제되고 동원되지 못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타(Susan Leigh Star)와 그리즈머(James Richard Griesemer)는 경계물(boundary objects)이란 서로 다른 사회세계(social worlds)에 속한 행위자들이 각자의 경계 내에 속하면서도 공통점을 지니는 상태를 갖는 물체라고 설명했다(Star & Griesmer, 1989; 김기흥, 2018). 경계물은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다양한 과학이나 기술과 연관된 행위자 공통체들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투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 대상물의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경계물의 개념은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 말하는 번역의 개념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Star & Griesmer(1989)는 번역은 단일한 의무통과지점을 지나야 하나, 경계물은 여러 개의 의무통과지점이 사회에서 형성되고 이 사이에서의 연합과 협상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김기흥, 2018). 경계물 이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사회세계 개념은 스트라우스(Anselm Strauss)에 의해 제시된 개념으로 “담론의 우주(universes of discourse)”라고 정의된 바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사회세계는 복수의 집합적 행위자들이 공유된 대상을 갖고 작업하는 모임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Clarke & Star, 2008; Strauss, 1978).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세계는 여러 세계로 나누어지고 또 유사한 점을 공유하는 다른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사회세계의 수가 증가하여 상호작용이 복잡해지면 그 전체를 하나의 영역(arena)으로 분류한다. 즉, 하나의 영역은 유사한 관심사를 공유하고 활동하며 상호작용하는 여러 사회세계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어떻게 하나의 기술을 두고 충돌하고 협상하는지 보여준다. 본 연구에서 ‘키오스크’나 ‘스마트폰 앱’과 같은 기술적 인공물은, 디지털 기술에 익숙하여 이를 효율적인 도구로 여기는 ‘디지털 네이티브의 사회세계’와, 기술에 대한 불신과 어려움을 느끼는 ‘기술 소외 계층의 사회세계’ 사이에 놓인 ‘경계물(boundary object)’로 분석될 수 있다. 이 경계물이 두 세계의 협력과 소통을 돕는 대신, 오히려 두 세계 간의 이해를 가로막고 단절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이는 데 이 이론은 매우 유용하다. 재서노프(Sheila Jasanoff)와 김상현은 ‘사회기술적 상상’을 “국가별 과학기술적 프로젝트의 설계와 실행에 반영된 집단적으로 상상된 사회적 삶과 질서의 형태”라고 정의한다(Jasanoff & Kim, 2009; 2013). 초기 연구에서는 원자력 발전 기술 개발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의 사회기술적 상상의 차이가 각국의 정책과 담론의 차이에 영향을 미쳤음을 살펴보았고, 이후 에너지 전환과 기업 및 국제기구로 논의를 확장하였다(Jasanoff & Kim, 2009; 2013; 2015). 또한, 한국의 줄기세포 논란을 바이오 산업의 발전이라는 상상과 민주적·윤리적 통제라는 상상이 충돌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면서 상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담론과 행위자 간의 경쟁의 결과로 변화하는 것임을 분석하였다(Kim, 2014). 이러한 관점에 따르자면 사회기술적 상상은 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서 사회가 어떠한 상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상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회세계 이론과 연계되어 어떠한 집단이 상상에서 포함되고 배제되는지에 따라 기술의 설계 또는 확산 과정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교차하지 않는 사회세계에서 생성된 상상이 경쟁하면서 단일한 상상이 우위를 점하고 다른 상상을 밀어내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화 과정을 비용 절감과 효율화를 통한 경제적 발전의 도구로 바라보는 상상에 노년층은 사용자 집단으로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년층을 고려한 기술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제시되었던 발전국가 논리에 기반한 한국에서의 사회기술적 상상과 유사성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상상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술의 설계에서 배제되어 기술적 노화를 겪게 되므로 기술적 노화는 상상에서 제외되는 잊혀짐의 과정으로 해석할 여지를 제공한다.
이 글에서 핵심 개념으로 제시하는 ‘기술적 노화’는 기존 노인학(gerontology)이 ‘나이 듦’을 이해해 온 과정의 연장선 위에 있다. 노인학은 나이 듦을 단일한 현상으로 보지 않고,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힌 과정으로 분석해 왔다. 본 절에서는 나이 듦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 살펴봄으로써, 디지털 시대에 나이 듦의 ‘기술적 차원’을 새롭게 추가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인학이라는 학문은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는지에 대해 유전적 원인과 신체 건강을 포함하는 생물학적 요인과, 인지, 정신 건강, 웰빙을 포함하는 심리학적 영향과, 개인적 인간관계에서부터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 정책, 사회기반시설까지의 다양한 사회학적 요인을 총괄하여 다루는 분야다. 초기 노인학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생리적으로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다루는 학문이었다. 즉, 노화를 유전적, 생리적 변화와 같은 생물학적 사실로 간주한 것이다. 노인의학(geriatrics)이 노화에 따른 특정 질병의 진단이나 처치에 집중하는 것처럼(Brossoie, 2010) 나이 듦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쇠퇴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세포와 유전체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노화 과정에 상당한 개인차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이는 나이 듦을 획일적인 생물학적 쇠퇴 과정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생애 주기 전반의 경험과 사회적 요인이 노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탐구를 촉진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러한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비판적 노인학(critical gerontology)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노인학에서 자연과학 위주의 객관적 지식이 지배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철학, 사회학, 과학사적 접근을 통해 노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관점에서는 노인의 저체온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저온을 감지하는 능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난방 요금을 지불할 능력이 부족한 사회적 문제와 연계된다고 본다(Wicks, 1978). 기억력 감퇴가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으로 재구성되면서(Gubrium, 1986) 특정한 신체적, 인지적 상태를 사회가 어떻게 정의하고 관리하는지를 살펴보기도 한다. 따라서 노인의 여러 문제는 다양한 형태의 제도화된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관계를 분석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Baars, 1991). 이러한 사회적 구성론의 관점에서 볼 때, Butler(1969)의 연령차별주의(age-ism)는 개인의 편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년층을 사회적으로 무력하고 비생산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정치경제적 과정에서 배제하는 구조적 차별을 의미한다. 노인은 사회가 만든 ‘나이 듦’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규율되고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이처럼 나이 듦을 고정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비판적 노인학의 통찰은, 다음으로 제시할 ‘기술적 노화’를 논의하기 위한 필수적인 이론적 발판이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비판적 노인학은 나이 듦을 고정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길을 열었다. 20세기의 비판적 분석이 주로 자본주의, 복지국가, 의료 시스템과 같은 사회경제적 구조가 나이 듦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주목했다면, 21세기의 우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해 있다. 바로 디지털 기술이 사회의 기본 운영 원리가 된 시대에, 기술과 사회의 관계가 나이 듦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기술적 노화(technological aging)’를 나이 듦을 구성하는 세 번째 요소로 제시한다. 이는 생물학적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와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기술 변화의 속도와 사회 시스템의 디지털 전환을 개인이 따라잡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낙인과 배제 과정을 의미한다. 즉, ‘기술적 노화’는 개인의 역량 부족 문제라기보다는, 특정 기술을 표준으로 삼는 사회가 그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정상적이고, 뒤처지고, 무능력한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적 과정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으로는 젊더라도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누구나 ‘기술적으로 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노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경험된다.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노인의 뒷모습, 모바일 뱅킹 앱을 사용하지 못해 더 비싼 수수료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 온라인으로만 판매되는 공연 티켓을 구하지 못하는 소외감은 모두 기술적 노화를 겪는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이다. 사회 시스템이 디지털 리터러시를 가진 사람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상정하면서, 그렇지 않은 이들은 기본적인 사회 참여의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집에서 나이 들기(aging in place)’와 같이 선한 의도를 가진 기술적 개입에도 비판적 시사점을 던진다. 집에서 나이 들기는 “요양시설보다 기존의 공동체 안에서 어느 정도 자립적인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행위”로(Davey et al., 2004), 기존의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주택의 의미보다 친숙함과 안전함을 느끼는 동시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많은 노화의 과정으로 여겨졌다(Wiles et al., 2012). 이에 따라 고령자의 독립적인 삶을 돕기 위해 각종 보조 기술과 원격 감지 장치가 개발되었다(Joyce & Loe, 2010). 그러나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듯, 이런 기술들은 그 유용성 이면에 노년의 몸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며, ‘정상’과 ‘위험’을 구분하여 관리하는 새로운 규율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기술은 노인을 ‘자율적 주체’로 지원하기보다,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한 ‘의존적 관리 대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의 기술적 노화를 심화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실제로 최근 간호 분야에서는 환자의 위험 식별, 건강 상태 예측 등 다양한 AI 기술이 도입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의 확산은 효율성 증대 이면에 데이터 편향이나 책임 소재 불분명과 같은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Ruksakulpiwat et al., 2024). 결론적으로, 노인학이 나이 듦의 사회적 구성성을 밝혔듯이, 우리는 이제 기술이 나이 듦을 어떻게 새롭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기술적 노화'라는 개념은 바로 이 분석을 위한 출발점이다. 다음 4장에서는 기술과 나이 듦의 관계에 관한 기존 연구들을 이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논의를 심화할 것이다.
앞선 3절에서 ‘기술적 노화’를 나이 듦을 구성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제시했다면, 본 절에서는 기술과 나이 듦의 관계를 다루어 온 기존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존 논의들이 주로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왔는지 그 성과를 살피고, 동시에 '기술적 시민권'의 관점이 왜 필요한지 그 한계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Jæger(2021)에 따르면, 디지털 시민권 연구는 주로 디지털 권리, 정치 참여, 공공 서비스, 교육이라는 네 가지 흐름 속에서 다루어져 왔다. 이 글은 이러한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특히 ‘나이 듦’이라는 차원과 결합할 때 드러나는 새로운 문제, 즉 ‘기술적 노화’ 현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노년층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첫 번째는 디지털 기술의 확산이 낳는 사회적 불평등과 격차,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배제를 조명하는 ‘디지털 격차’ 관점이다(Kania-Lundholm & Manchester, 2022). 키오스크나 디지털 전환에 따른 모바일 앱 사용의 어려움, 그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문제가 이 관점의 주요한 분석 대상이다. 이러한 디지털 격차는 단순히 기술 접근성의 유무를 넘어,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과 목적의 차이에서도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격차는 노년층 ‘내부’에서도 발생하며 새로운 양극화를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능숙한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WhatsApp을 자녀 및 손주와의 관계 유지라는 특정 목적에 맞게 활용하며 다양한 사회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Caliandro et al., 2021). 반면 스페인의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에서는, 연령대가 높을수록 소통 목적의 앱 사용 비중이 감소하고 개인정보 관리용 앱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Rosales & Fernández-Ardèvol, 2016). 이 두 연구를 종합하면, 기술에 능숙한 노년층은 디지털 소통을 활발히 이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욱 고립되는, 노년층 내의 디지털 양극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관점은 기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술적 해결주의(technological solutionism)’의 관점이다. 원격 돌봄(tele-care) 기술 및 로봇을 통해 노년층의 외로움과 건강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연결망을 유지시키려는 개입주의 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Peine & Neven, 2019). 그러나 두 접근 모두 한계를 지닌다. 디지털 격차 담론은 노년층을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피해자로만 묘사하여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반면, 기술적 해결주의는 기술의 선한 영향만을 가정함으로써, 기술 설계에 내재된 편향이나 기술이 야기하는 새로운 통제와 감시의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Peine & Neven(2019)이 지적한, 기술 설계자들과 실제 사용자인 노인 사이의 깊은 간극, 즉 ‘라투르적 분열(Latourian divide)’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비롯된다. 또한, 노인에 대한 사회기술적 상상이 여전히 돌봄의 대상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을 통해서 노인의 외로움과 건강 문제를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기술과의 관계에 있어서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자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길들이기(domestication)’ 이론이다(Lie & Sørensen, 1996). 그러나 기술을 성공적으로 길들이는 과정은 단순히 사용법을 익히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길들이기는 기술과 사용자,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적절한 물질적, 정서적, 관계적 배치’를 찾아가는 섬세한 탐색의 과정이며, 이 과정에는 종종 간과되는 ‘돌봄에 필요한 정서적, 윤리적 유지 관리 작업’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de la Bellacasa, 2011). 나아가 Søraa et al.(2021)은 기존의 실용적(practical), 상징적(symbolic), 인지적(cognitive) 길들이기라는 세 차원으로 나뉜 길들이기 이론(Berker, 2005; Lie & Sørensen, 1996)에 ‘사회적 길들이기(social domestication)’의 차원을 추가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기술 길들이기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가족, 의료 종사자, 친구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사회적 길들이기는 앞서 논의한 사회세계 이론과도 이어지는 논의다. 개인뿐만 아니라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어떻게 공통의 세계를 형성하는지, 이 과정에 기술이 어떻게 얽혀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특히 로봇과 같은 돌봄 기술은 사용자-로봇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가족이나 전문가와 같은 제3의 행위자가 매개하는 상호작용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노인이 기술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에 노출될 경우, 여러 기술적, 정서적, 제도적 장벽이 그 관계의 지속성을 위협한다. 따라서 ‘매개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길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매개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신희선·전치형, 2018). 이는 길들이기 과정에서 노인과 비노인의 사회세계를 이어주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회적 길들이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사회-기술 생태계(socio-technical ecosystem)’다. 이는 최종 사용자인 노인뿐만 아니라, 공식적 돌봄 제공자인 의료 종사자, 비공식적 돌봄 제공자인 가족 구성원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기술을 중심으로 상호작용하며 안정적인 관계망을 형성한 상태를 의미한다(Søraa et al., 2021). 길들이기 이론이 사용자의 행위성을 강조한다면, ‘나이 듦과 기술의 공구성(CAT; co-constitution of aging and technology)’ 이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 1>과 같이 기술과 사회가 서로를 만들어가는 구조적 과정을 조명한다(Peine & Neven, 2021). 이 관점에 따르면, 기술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나이 듦의 상(像)’을 가정하고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노인은 신체적으로 약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상상이 각종 원격 돌봄 기술의 설계를 유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술은 다시 현실의 노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행동 양식을 바꾸며 ‘나이 듦’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이러한 순환적 관계는 기술과 나이 듦의 문제가 단기적인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기술 시스템 전체를 함께 고려해야 함을 보여준다. 즉, 나쁜 기술 설계가 연령차별주의를 강화하고, 연령차별주의적인 시선이 다시 나쁜 기술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를 분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존 논의들은 기술과 나이 듦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디지털 격차, 기술 길들이기, 공구성 이론 등은 문제를 점점 더 정교하고 다층적으로 분석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는 여전히 중요한 한계가 존재한다. 바로 노년층을 ‘문제 해결의 대상’, ‘능동적 사용자’, ‘혁신 과정의 참여자’로 바라볼 뿐, 이들을 권리와 의무의 주체인 ‘시민(citizen)’으로 온전히 호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EC; European Commision) 등에서 노년층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소비자나 혁신에 기여하는 참여자로 보는 시각(Lipp & Peine, 2022; Peine et al., 2017) 역시 진일보한 관점이지만, 그들의 역할을 여전히 경제적 범주 안에 가두고 있다. 그 사례로 전기자전거를 들 수 있다. 초기 전기자전거는 노년층을 핵심 사용자로 삼았고, 이들과의 상호작용 및 피드백을 통해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갔다. 이 과정에서 노년층은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기술 혁신에 기여하는 능동적인 행위자이자 새로운 사회-기술 시스템의 변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Peine et al., 2017). 이런 사례처럼 노년층이 혁신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하지만,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단지 더 나은 상품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기술 시스템의 설계와 운영 원리에 대해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고 있는가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기존 논의의 성과를 딛고, “기술적 배제가 어떻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적 참여를 가로막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즉, 문제를 ‘접근’과 ‘사용’의 차원을 넘어 ‘권리’와 ‘참여’, 즉 ‘기술적 시민권’의 차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다음 절에서는 2절에서 검토한 STS 이론들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이 질문에 답할 것이다.
이 글에서 제시한 ‘기술적 노화’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기술 시스템이 특정 집단을 배제하며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과학기술학의 이론들을 통해 입체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먼저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관점에서, 현재의 디지털 전환은 새로운 연결망이 기존 연결망을 대체하는 권력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기치로 내건 기업, 개발자, 정부 등은 ‘키오스크-모바일 앱-신용카드’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결망을 구축하고 이를 경제 활동의 ‘의무통과지점(OPP)’으로 설정한다. 이런 번역의 과정에서 ‘대면 창구-직원-현금’이라는 기존 연결망에 익숙했던 노년층은 배제된다. 새로운 연결망은 노년층의 필요와 경험을 ‘등록(enrollment)’시키는 데 실패하며, 결과적으로 이들을 사회경제적 활동의 변두리로 밀어낸다. 이는 사회세계 이론으로도 설명된다. 디지털 기술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사회세계와 ‘기술 소외 세대’의 사회세계 사이에 놓인 ‘경계물’이 된다. 그러나 이 경계물은 두 세계의 소통과 협력을 돕기보다, 속도와 효율이라는 한쪽 세계의 논리만을 강요하며 두 세계의 단절을 심화시킨다. 키오스크는 두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쪽 세계의 언어만을 사용하는 불통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적 노화’는 특정 기술 연결망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다른 사회세계를 배제하는 사회기술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이 과정 속에서 개인은 무력감을 느끼고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그러나 경계물이 서로 다른 사회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여전하다. 배제의 과정을 반대로 생각한다면, 사회기술적 상상의 범위에 노년층을 포함시킴으로써 포용적인 공동체를 형성함과 동시에 기술적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집단이 배제되는 사회기술적 상상이 아니라 동등한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상상의 구축을 통해서 세대 간 공존을 추구할 수 있다. ‘기술적 노화’에 대한 대응은 단순한 복지나 시혜적 차원을 넘어, 모든 구성원의 ‘기술적 시민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기술적 노화’ 문제는 지역적 맥락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흔히 고령화 문제는 농어촌 지역의 과제로 인식되지만, 키오스크나 무인화 시스템의 도입은 오히려 도시 지역에서 더 빠르게 진행되어 새로운 ‘도시형 기술 소외’를 낳는다. 이는 정책 대상 집단의 식별을 복잡하게 만들며, 디지털 전환의 경제적 효용 또한 재고하게 한다. 많은 노년층이 온라인 시스템을 불신하여 여전히 오프라인 창구를 이용하는 데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까지 고려한다면(조선일보, 2021. 06. 16.), 무인화가 과연 저렴한 대안인지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적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첫째, ‘최소한의 시민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키오스크 사용법 교육과 같은 정책도 중요하지만, 이는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할 위험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디지털 방식을 이용하지 못하더라도 추가 비용이나 불이익 없이 공공 및 민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비디지털 대안(non-digital alternative)’을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는 Jæger(2021)가 지적했듯, 디지털 전환으로의 편입이 시민의 권리인지, 혹은 그 전환을 거부하는 것 역시 시민의 권리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딜레마와 맞닿아있다. 또한 최근 법학계에서 논의되는 ‘아날로그 접근권’(류성진, 2024)을 제도화하는 것으로, 공공기관이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처음부터 디지털과 아날로그 방식을 모두 준비하고, 민간사업자에게도 유인 창구 유지 등을 통해 아날로그 접근성을 보장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째, ‘우연과 호의에 기댄 매개’를 넘어 ‘제도적 매개’를 설계해야 한다. 현재 디지털 약자들은 주변의 젊은이나 점원의 도움이라는 우연적이고 불안정한 매개를 통해 겨우 기술의 문턱을 넘고 있다. 이 ‘매개’의 역할을 주민센터, 복지관의 디지털 안내사와 같은 공공 영역과 은행, 병원의 상주 도우미의 민간 영역에서의 공식적인 역할로 제도화해야 한다. 이러한 인적 지원과 더불어, 기술 설계 자체도 변해야 한다. 단순히 글자 크기를 키우는 1차원적 설계를 넘어, 사용 과정의 불안과 불신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기술 내부에 도움말 기능을 강화하거나, 지속적인 홍보와 교육을 통해 기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심리적 지원도 병행되어야 한다. 다만 이 과정이 청년층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계몽주의적 태도로 흐르지 않도록, 노년층의 눈높이와 경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Millard et al.(2018)의 연구는 이러한 정책 제언의 현실적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호주의 한 인터넷 카페 사례에서, 공식적인 교과과정 방식의 교육은 오히려 노인들을 위축시켰지만, 참여자들이 서로 돕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우는 실천 공동체이자 사회적 학습 시스템을 구축했을 때 중도 탈락자 없이 높은 참여와 만족도를 이끌어냈다. 이는 성공적인 매개가 일방적 가르침이 아닌, 존중과 필요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 형성 과정임을 시사한다. 셋째, 노년층을 혁신의 주체 역할을 부여할 수 있다. 전기자전거 사례에서 보듯, 노년층은 자신들의 필요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 혁신을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다(Peine et al., 2017). 이 과정에서 리빙랩이나 수요기반 혁신정책과 같은 혁신 수단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노년층이 기술의 개발 과정 또는 사전 테스트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새로운 시장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동시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또 다른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 기존의 청년층 중심의 제품 디자인과 시장 구조로 인한 경로의존성을 해소하여 혁신을 촉진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므로 수요기반 혁신 정책이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사례에 해당한다(최영락 외, 2011). 마지막으로, 노년층을 수동적 수혜자에서 능동적 시민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혁신의 주체로 인식을 전환하는 과정은 단순히 경제적 부가가치를 넘어, 사회적 참여를 통해 노년층의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고, 연령차별주의적 인식을 개선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노년층을 복지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공화국의 시민으로 바라보게 하여 기술적 시민권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재인식은 디지털 격차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시혜적 배려에서 헌법적 의무로 전환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법학 연구에서도 지적하듯이, 고령층의 정보 접근성 보장은 국가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기본권 보호 의무이며 이를 위한 정책들은 국가의 적극적 의무에 해당하나, 현행 법률이 이 문제를 주로 편의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류성진, 2024). 따라서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여러 법·제도를 개편하여 노년층도 동등한 층위에서 정책 담론에 편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년층이 사회기술적 상상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을 막고 포용적 상상을 촉진 및 형성함으로써 기술적 노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기술적 시민권의 회복을 도울 것이다. ‘기술적 노화’와 ‘기술적 시민권’의 문제는 과학기술학에 새로운 학문적 과제를 던진다. 첫째,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이 과학기술에 내재된 남성 중심성을 비판했듯이, 기술에 뿌리내린 ‘청년중심성(youth-centrism)’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제로니스트 과학기술학(Geronist STS)’(가칭)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는 기술 설계의 표준이 되는 정상 사용자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기술적으로 늙은’ 몸의 경험과 관점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지식(situated knowledge)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둘째, ‘기술적 불안’을 돌봄의 정치학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Leem(2016)이 ‘수술 불안’을 조명했듯이, 기술의 사용 역시 단순히 사용의 측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전후에 발생하는 복합적인 불안의 문제를 살펴야 한다. 사용 전에는 온라인 거래에 대한 불신이나, 단순한 통화 기기였던 휴대폰이 복잡한 만능 기기로 변모한 데 대한 인지적 부담감이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기술적 불안을 해소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매개자의 활동은 단순한 기술 지원이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돌봄 노동’이다. 신희선·전치형(2018)이 말하는 ‘매개자’는 바로 이 돌봄 노동의 수행자다. 제로니스트 과학기술학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이처럼 비가시화된 돌봄 노동을 드러내고 그 정치적·윤리적 가치를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인을 돌봄의 대상에서 돌봄의 주체로 전환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기술적 노화를 겪는 노인에 대한 돌봄에 집중했다면, 이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노인에 의한 돌봄의 현장 역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맞벌이 가정의 손주를 조부모가 양육하는 것은 산업화 이후 중요한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해왔으며, 그 이전 대가족 시대의 교육적 역할 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뿌리를 갖는다. 이러한 노인에 의한 돌봄은 방과 후 학교나 지역 공동체 활동 등 현대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노년층이 일방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능동적인 행위자임을 보여준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인 손주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인 조부모의 돌봄 관계 속에서 기술이 어떻게 매개되고 재해석되는지를 살피는 연구는, 기술적 노화와 세대 간 상호작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할 것이다.
이 글은 AI 기술이 가속하는 디지털 전환 시대에, 기술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낙인찍히는 현상을 ‘기술적 노화’로 명명하고, 이것이 민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기술적 시민권’의 위기임을 주장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나이 듦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비판적 시각 위에서, 본고는 기술과 나이 듦이 서로를 만들어가는 공구성 관계에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본고는 먼저 기술적 노화가 발생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특정 기술이 사회의 의무통과지점이 되면서 기존의 연결망이 붕괴되고, 서로 다른 사회세계가 기술이라는 경계물을 사이에 두고 단절되는 과정 속에서 ‘기술적 노화’가 구조적으로 발생함을 보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이 문제에 대한 대응은 단순한 복지를 넘어 기술적 시민권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했다. 비디지털 대안의 보장, 제도적 매개자 확충, 그리고 노년층을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혁신 주체로 재인식하는 정책적 전환을 제안했다. 나아가 학문적으로는 기술에 내재된 ‘청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제로니스트 과학기술학(Geronist STS)’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기술적 불안’을 돌봄의 정치학 관점에서 분석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논의는 고령화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자체에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고령화를 극복하거나 되돌려야 할 문제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세대가 기술 사회의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서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노년층을 단지 ‘돌봄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을 거두고, 그들이 가진 경험과 지혜가 어떻게 사회 혁신의 동력이 될 수 있는지,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공동체의 중요한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논의는 새로운 연구의 지평을 연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손주 세대와 ‘기술적으로 늙은’ 조부모 세대 사이의 일상적인 돌봄 관계 속에서 기술과 나이 듦, 그리고 세대 간의 관계는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탐구는 기술 시대의 정의로운 세대 간 공존을 모색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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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학기술학의 이론들
1) 돌봄의 과학기술학
2)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
3) 사회세계와 경계물
4) 사회기술적 상상(Sociotechnical Imaginaries)
3. 나이 듦의 재구성: 생물학적, 사회적, 그리고 기술적 노화
1) 나이 듦의 사회적 구성
2) 노인학과 과학기술학
4. 기술과 나이 듦의 관계 맺기: 기존 논의의 성과와 한계
1) 디지털 격차 문제와 기술적 해결주의
2) 기술을 길들이기
3) 나이 듦과 기술의 공구성
그림 1. 나이 듦과 기술의 공구성 메커니즘(Peine & Neven, 2021)
4) 기존 논의의 한계와 새로운 질문: ‘시민’의 자리는 어디인가?
5. 분석과 함의: 기술적 노화의 과정과 기술적 시민권의 재구성
1) 기술적 노화의 과정 분석: 배제와 소외의 연결망, 그리고 포용적 상상
2) 정책적 제언: 기술적 시민권의 회복을 위하여
3) 학문적 제언: 제로니스트 과학기술학과 돌봄의 정치학
6.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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