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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신화 사이에서 : 아미타브 고시,『육두구의 저주』 (황교련)

서평


지식과 신화 사이에서
: 아미타브 고시, 『육두구의 저주』


황교련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krhwang27@gmail.com



1621년 4월 21일 자정 무렵,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의 네덜란드인 거처에서 한 램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폭력의 빌미를 찾고 있던 동인도회사의 관리 마르테인 송크(Martijn Sonck)에게 이는 학살을 시작할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는 램프 소리가 자신과 네덜란드 병사들에 대한 반다 제도 주민들의 기습 공격 신호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을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시작했다. 반다 제도에서의 학살은 원활한 식민 통치를 위한 군사적 충돌이었을 뿐 아니라 값진 향신료인 육두구 나무의 열매를 독점하기 위한 네덜란드인들의 상업적 전략의 핵심이기도 했다. 반다 제도의 육두구 열매는 토착민들의 손에서 분리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상품이 되었다. 백과전서를 편집한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는 곧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은 자국에 부족한 모든 것을 구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찾는다”라고 인정했고, 네덜란드 정물화에는 향신료가 중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59). 사회인류학 박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이 사건을 씨실로 삼아 식민주의와 환경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다양한 비판을 능숙하게 엮어낸다. 원래 이 책을 펴게 된 것은 자본주의 연구모임이라는, 작지만 생기 넘치는 학과 내 한 소모임에서였는데, 상품 경제와 환경의 관계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를 선택해 논의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글로벌 상품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책의 제목과는 달리, 이 책에서 육두구가 역사적 추적자(tracer)보다는 은유로써 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이 비인간 행위자를 면밀하게 따라가면서 그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쌓아 올리는 역사적 묘사에 있다기보다는, 어떻게 과거의 지구와 현재의 지구가 동일한 구조하에서 환경과 인간에 대한 착취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세련된 학계의 동향을 반영하여 풀어내는 데에 있었다.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이 책은 여러 통찰을 던져주었다. 저자가 서론에서 강조하듯 21세기에는 식물로부터 온 제품이 이전보다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화이며, 현실은 그 정반대이다. 도자기나 옷감 같은 공산품이 무역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던 수백 년 전에 비해, 오늘날의 인류는 화석 연료와 농산물처럼 식물 유래 물질에 오히려 더 크게 의존하고 있다(31). 지구가 그 어느 때보다 인류 역사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지금, 반다 제도의 사건과 함께 병치 되는 착취와 폭력의 사례들은 각 시대에 대한 세밀한 관심을 원하는 독자들보다는 역사를 통해 “오늘을 위한 본보기”를 찾으려는 독자들에게 더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32). 

이 책에서 고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비인간을 포함하는 내러티브의 부재가 지구 위기의 가장 중심적인 원인이 되어왔다’라고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생물을 조사하고 수집하고 상품으로 만드는 일련의 실행 이전에, 비인간에게 행위성이 없다고 단정 짓게 된 근대적 세계관, 인식, 혹은 말살된 상상력이야말로 지구와 인간에 대한 착취와 환경 위기라는 결과로 미끄러지게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대부분의 역사 서술에서 언어를 갖지 못한 개체들은 “인간이 펼쳐가는 드라마의 배경으로서만 등장한다(48).” 과학사학자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가 고전적인 저작에서 지적했듯이,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에 대한 과학의 게걸스럽고 폭력적인 탐구와 함께 자원 추출과 마녀사냥, 즉, 인간에 대한 착취와 자연에 대한 착취를 동시에 정당화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득세하면서 자연은 그 자체로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자원’으로 생각되었고, 인간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불평등을 잘 보여주는 ‘재료’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인식이 지금까지 소위 “서구 제국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불평등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 고시의 주장이다. 

저자에게 지식의 형성과 이동을 연구 질문으로 삼아온 과학학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때때로 근대적 기계론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많은 인문·사회 연구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토착민들의 다양한 인식의 방법들을 명문화될 수 있는 지식으로, 혹은 소위 ‘테크(Traditional Ecological Knowledge, TEK)’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수집하여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121).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이름은 ‘시민 전문성(lay expertise)’이나 ‘지역적 지식(local knowledge)’일 것이다(Epstein, 1995; Hayden, 2004). 고시는 이것이 토착민들의 세계관과 전반적인 생활 양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익한 지식으로 분리되어 확산, 응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본적 오류를 드러내”는 용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121). 그가 보기에 더 나은 해결책은 모든 토착민의 지식을 우리의 과학적 체계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스탠딩 록 수족(Sioux) 보호 구역의 송유관 반대 활동가들이 경험했던 것과 같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느끼는 공감 능력의 발휘이다(333). 

토착민들의 신화는 살아있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대안적 방식으로 등장한다. 반다 제도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인 말루쿠 제도에서는 화산과 육두구에게 행위성을 부여하는 이야기가 살아남았다. 화산은 이들에게 이야기의 화자이자 역사의 제작자이다. 화산은 마치 가이아처럼 인간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였고, 불길한 징조나 전조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는 존재였다. 저자가 반다 제도로부터 왔을 거라 짐작하는 말루쿠의 한 노래에서, 지혜의 열매인 육두구는 죽어서 자신의 길을 떠나는 존재로 남아 있다(53). 모든 자연물이 인간들처럼 상호작용하고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생기론적 세계관이 상상 속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증될 수 있는 사실에 근접한 것이라고 본다. 부처의 깨달음과 함께 보리수나무가 기억되는 것처럼, 공생은 예외가 아닌 규칙에 더 가깝다(275). 독일어권 생물학자 야콥 윅스퀼(Jakob Uexkull)은 1930년대에 모든 유기체가 각자의 감각을 통해 환경을 해석하며 특수한 경험 세계를 창조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고시는 인간의 내러티브 능력이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철새들이 하는 것처럼 “장소에 대한 애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가장 동물적인 능력이라고 말한다(283). 이러한 관점에서, 토착민으로부터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현대 과학이 놓친 지식의 파편들이 아니라 기계론적 세계관 안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고유한 능력, 즉 환경과 비인간에 대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고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비인간의 행위성을 마냥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서구 제국주의는 행위성과 함께 책임을 뚝 떼어내어 비인간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고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착지를 박탈하는 과정이 군사적이었다기보다는 환경을 우회한 “생물정치적 전쟁”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정착민 식민주의의 확장에는 병원균, 강, 숲, 식물, 동물 등이 모두 일정한 몫을 담당했다(83). 문제는 학살자들이 “면역학적 결정론”을 통해 병원균에게 책임을 돌리고 죄책감을 달래려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광산에서의 혹사나 토지 및 식물의 파괴, 사냥감 말살 등이 병원균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력을 급속히 감소시켰고, 초기의 유럽 출신 정착민들 역시 비슷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면 곧바로 질병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86). 생물학적 우월성에 대한 백인들의 신화는 뿌리 깊게 지속되어서, 지금까지도 기후변화와 전염병에 대한 특권층의 무행동을 정당화해주는 측면이 있다(237). 세계관의 전환 없는 비인간에 대한 관심은 낭만화된 자연을 민족주의와 결합하기도 했는데, 독일의 “그린 유토피안(Green utopian)”이었던 히틀러와 그의 “에코파시즘”은 이러한 역사적 경로를 예증하고 있다(313). 비인간은 분명 행동하지만, 결코 인간과 분리되어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학 전공자들이 이러한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학술적 기여와 자아실현, 양쪽 모두에서 헤매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나는 이 책이 크게 두 가지의 생각해볼 만한 점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먼저 구성면에서, 이 책은 다양한 비판 학문과 자연과학의 의미를 현대의 ‘지구 위기’를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책이 미국의 군사화가 불러오는 생태적 영향과 같은 몇몇 잘 연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해주기도 하지만(175), 이 책이 가진 힘은 개별 사례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보다는 다양한 환경사 및 제국주의 논의를 학술적 추세에 뒤떨어지지 않게,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엮어낸 데에서 나온다. 어쩌면 연구자들은 이 책을 읽고 첨단에 있는 자신의 연구가 지구 위기를 구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장 면에서, 신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저자의 외침은 다소 순진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희망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브뤼노 라투르는 자신의 한 책에서 자신의 박사논문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가상의 사회과학 대학원생을 꾸짖은 바 있다. “왜 너의 작고 미미한 텍스트 하나가 자연과학의 거대한 실험실보다 자동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연관을 맺을 거라고 생각하지? 인텔 반도체가 휴대전화와 연관을 맺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갔는지를 보게!”(Latour, 2005: 155) 파스퇴르가 광견병 백신을 만들어 내고 보급하는 데 들인 물질적, 정치적 고군분투를 생각해본다면, 하나의 담론이나 인식이 자동적으로 세계의 인구로 퍼지고 받아들여지고 기후 위기를 막아낼 수 있다는 주장은 꿈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 진원지가 토착민의 생기론적 신념이든, 인문학자의 비판이든 말이다. 따라서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은 머리 한구석에서는 연구의 목적지를 끊임없이 상상하되, 눈과 손으로는 더욱 성실하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따라가고 써내는 것일 수 있다. 특히 지식과 기술이 가지는 다양한 가능성에는 더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비록 더 나은 방향이었는지는 의문일지라도, 이것이 적어도 지구와 인간을 무엇보다 극적으로 변화시켜온 방법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pstein, Steven (1995), “The Construction of Lay Expertise: AIDS Activism and the Forging of Credibility in the Reform of Clinical Trials”,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Vol. 20, No. 4, 408-437. 

Latour, Bruno (2005),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Hayden, Cori (2004), When Nature Goes Public: The Making and Unmaking of Bioprospecting in Mexico,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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