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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저널 제3호(2026.06.)

'사이'는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들이 만드는 학생저널입니다.  제3호 PDF 다운로드 특집: 감각과 상상 그림의 인지심리학과 관찰의 이론적재성 강규태 가속기 감각하기 : 현장연구자의 민족지 연구 방법론에 대하여 김연화 기술은 어떻게 우리를 늙게 하는가? : '기술적 노화'와 돌봄의 STS 심은섭 케플러의 『꿈』, 달에 관한 광학 이론과 상상 장신혜 서평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 박윤지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 김은성, 『감각과 사물: 한국 사회를 읽는 새로운 코드』 손하늘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안유진 대학원생 이모저모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 강정섭 낯선 캠퍼스에서 새로운 공부와 익숙해지기 오수환 헌 신입생의 수기 이준영 2025 APPSA TAIWAN 경험기 이형석 첫 학술 발표, 설레었던 데뷔 무대 : 2025 APPSA 참여 후기 정원호 '왜' 이후의 질문을 기다리며 : 과학학과 연극반 블랙박스 제1회 공연 <학술원 보고> 연출 후기 공일환 SF 단편 <미확인> 구본진 부록 학과 소식 편집 후기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안유진)

서평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안유진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ayujin@snu.ac.kr 왜 과학은 느려져야 할까? 사람들은 과학이 삶을 더 살기 좋게 해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고 있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기후 위기를 불러일으키거나 기업의 이윤 극대화에 쓰이는 등 삶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현재의 과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른 과학을 통해 공존과 공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벨기에의 과학철학자인 이자벨 스탱게르스(Isabelle Stengers)가 쓴 책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은 하나의 유일한 과학(Science)이 아니라 다원적인 과학(science)를 추구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2013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쓰였고, 2025년에 한국어로 출간된 판본은 2018년에 출간된 영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1]   과학은 위험에 마주해 있다. 단일한 기준을 내세우고 객관성을 강조한 ‘빠른 과학’은 과학적 연구의 신뢰성을 훼손하려 드는 소문, 음모론, 불리한 이해관계를 드러내는 반론에 공격받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국가와 과학자들은 대중을 유아적으로 보고 그들이 ‘과학을 이해해야 한다’라거나 ‘과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라고 주장해 왔다. 반면 스탱게르스는 과학을 평가하고 과학과 세상의 연결성을 논의하고 과학자들에게 그 답을 요구하는 ‘감식가(connoisseurs)’를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느린 과학을 위해서는 과학자와 대중 모두가 변화하여야 한다. 느린 과학은 단순히 ‘느려짐’이 목적이 아니다. 피실험 행위자의 반항, 평가 방식에 대한 저항, 과학자 자신의 주저함 등 여러 마찰이 만들어 내는 ‘느림’이다. 마찬가지로 빠른 과학도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빠른 과학은 과학자들에게 속도를 늦추지 말기를 명령하고, 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할 시에는 생존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빠른 과학에 익...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김은성, 『감각과 사물』(손하늘)

서평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김은성, 『감각과 사물』 손하늘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jamiesohn@snu.ac.kr 사회과학자는 무엇을 목표해야 하는가? 사회 현상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기술해야 하는가, 아니면 올바른 해결책을 제안해야 하는가? 혹은 사회 현상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제작해야 하는가? 김은성 선생님께서는 몇 년 전 “무릇 사회학자라면 첫 번째를 정답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나는 의아했다. 사회 현상을 기술하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어떻게 사회 현상을 그려내는 것만으로 세상의 문제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감각과 사물』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는 제목을 충실히 따라 도덕과 시민권(1부), 에너지 전환(2부), 정치와 경제(3부)과 관련된 논의를 ‘감각과 사물’의 렌즈를 통해 읽어 내려간다. 저자들은 또한 여러 가내 활동들을 재해석하면서 이전까지 지식 생산자로 주목받지 못했거나 남성 석학들의 보조자 정도의 위치로만 해석되어왔던 여성들의 활동을 주목하기도 한다. 제1대 보퍼트 공작부인 메리 서머싯(Mary Somerset)의 지위와 활동을 정원사 혹은 수집가의 정원 활동(gardening)에서 식물학자의 진지한 식물 탐구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줄리 데이비스(Julie Davies)의 연구나, 식물학자인 헨데리나 스콧(Henderina Scott)과 물리학자인 허사 에어턴(Hertha Ayrton)을 그들이 속했던 비공식적 네트워크 안에 위치시키고 그들의 홈메이드 과학의 아마추어성에 어떻게 당대의 젠더 인식이 개입하고 있는지 분석하는 클레어 존스(Claire G. Jones)의 연구는 여성들의 연구와 여성 실행자(practitioner) 자체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공적이거나 사적인 네트워크 사이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위치를 확보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했는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집 안의 다양한 장소와 가족들을 호명하는 글들은 자칫 전체적인 구...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박윤지)

서평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 박윤지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flask42@snu.ac.kr 근대과학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가? 과학사 초기의 많은 연구들은 실험실이나 학회, 여행이나 상행처럼 대외적 교류가 일어나는 전문적이고 제도적인 영역에 주목했다. 그러나 과학은 정말로 공적이기만 한 것인가? 혹은 과학 지식은 공적인 장소들에서만 생산되었나? 지식이 생산된 장소는 과학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가? 그렇다면 공적인 장소가 아닌 곳에는 어떤 이들이 있었나? ‘공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던 곳에서의 과학 활동이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지식을 생산했는가?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Domesticity in the Making of Modern Science)』의 저자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과학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로 공적인 영역들보다는 가내 영역, 가정, 친족과 같은 ‘가내(domestic)’를 주목할 것을 이야기한다. 과학사학자 스티븐 셰이핀(Steven Shapin)이 ‘17세기 영국의 실험의 집(The House of Experiment in Seventeenth-Century England)’에서 신사들의 사택을 주목했던 것을 넘어, 저자들은 집 안의 다양한 공간들에서 어떤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이 활동들이 어떤 식으로 다시 가외의 장소들과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있다. [1]   저자들의 연구는 단순히 그동안 간과되었던 ‘가내’의 중요성을 발굴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며 계속해서 공과 사, 가정과 일의 이분법을 흔들고 그 구분 자체를 유연하고 투과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린다. 이자벨 레모농(Isabelle Lémonon)과 로랑 다메쟁(Laurent Damesin)의 「계몽과학에서 젠더와 공간 – 마담 뒤피에리의 과학 작업과 네트워크(Gender and Space in Enlightenment Science: Madame Dupiéry’s Scientific Work ...

다시 한번, 가치의 모든 것을 고민하다: 마리아나 마추카토, 『가치의 모든 것』 (강동협)

서평 다시 한번, 가치의 모든 것을 고민하다: 마리아나 마추카토, 『가치의 모든 것』 강동협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kanng1357@snu.ac.kr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세상의 흐름을 구성하는 매우 강력한 구성 요소 중 하나이고 경제학은 이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의 핵심 원리인 수요와 공급,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원을 배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장이 자유로울 때 최대 효용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경제학에서는 비효율적 행위자인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시장 실패와 같이 한정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경제학의 논리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는 기존의 경제학에 반문한다. 자유로운 시장이 최대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왜 발생한 것이고 이에 대해 기존의 경제학은 어째서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가? 또한 막대한 공적 자금을 통해 금융 부문을 구제한 정부는 정말로 비효율적 행위자에 불과한가? 주주 가치 제고라는 명목하에 단기적 수익 추구가 금융과 비금융을 통틀어 나타나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마추카토는 경제학에서 가치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추카토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의 혁신 및 공공가치 교수이며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무지향혁신정책(Mission-oriented innovation policy) 논의를 선도하는 혁신학자이다. 2013년 『기업가형 국가』에서 국가가 혁신 초기 단계의 위험을 최초로 감수하는 핵심 역할을 맡고 있으며 혁신에 상당히 기여한다는 점이 간과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아이폰에 활용되는 인터넷과 시리 기술이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GPS 기술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

이론 밖의 현실 : 이시윤, 『하버마스 스캔들』 (황록연)

서평 이론 밖의 현실: 이시윤, 『하버마스 스캔들』 황록연 서울대학교 과학기술과미래연구센터 직원  2021년 석사졸업  ghkdfhrdusreal@naver.com 사회학자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은 출간 당시에 한국 사회학자들에 대한 실명 비판으로 소란을 빚었다. 책의 과녁은 적극적인 상호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학술장, 현실 참여를 이유로 학계 외부를 곁눈질하느라 연구는 뒷전인 비판적 지식인, 서구 이론을 깊이 파고들거나 세계적인 석학들과의 논쟁에 뛰어드는 대신 서구 이론의 지적 종속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탈식민’ 사회과학자였다. [1] 그의 비판이 의도대로 논쟁의 불씨를 지폈는지 아니면 속상한 사람 몇 명을 만드는 데 그쳤는지는 잘 모른다. 적어도 공부를 막 시작한 2015년 말의 내게는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서구 인문학·사회과학계는 이러이러한데 왜 한국은 그렇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똑같은 감상을 말했을 것이다. 피상적인 감상보다 큰 결실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났다. 이시윤의 『하버마스 스캔들』은 1996년 하버마스 방한 행사에서 절정에 달한 하버마스 유행과 그 직후의 쇠퇴를 분석한 지식사회학 연구서이다. 1990년대 한국 학계가 휩싸인 비상한 열정은 어째서 그토록 빨리 식었는가? 그는 지도교수인 김경만과 마찬가지로 부르디외의 장(場)이론을 통해 해답을 찾았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학술장의 구성원은 외부의 관점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특수한 주제에 몰입하여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동료이자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경쟁자들의 공동체를 이룬다. 부르디외는 학술장을 주변부와 중심부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쓰이는 전략을 설명했는데, 이시윤은 이 설명에 암시된 두 가지 전략을 구체화하여 학술장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목한다. 첫째는 주로 학술장 중심부 엘리트가 사용하는 전략인 딜레탕티즘이다. 이를 택한 학자는 깊이가 떨어지는 지식을 넓은 주...

정책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과 사례에의 적용 : 권혁주, 『갈등사회의 공공정책』 (원영훈)

서평 정책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과 사례에의 적용 : 권혁주,『갈등사회의 공공정책』 원영훈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powhy123@snu.ac.kr 정책은 정부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추진하는 구체적인 활동이다. 그렇지만 그 목적은 불가피하게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경제적 재화를 분배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기 마련이며, 경제적 이해관계 및 사회적 집단의 충돌, 또는 가치관의 대립을 수반하게 된다. 저자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의 권혁주 교수는 공공정책의 정치이론, 갈등관리, 국제개발협력 관련 주제들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이 책에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들이 어떻게 정책 목적에 합의할 수 있을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행정관료들은 어떤 규범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제1부에서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정책 갈등관리와 관련된 이론적 전제들을 살펴보고 사회갈등 관리를 위한 원칙과 시민의 덕목들을 제시한다. 제2부에서는 정치와 행정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적 규범으로서 책임성 원칙을 강조한다. 제3부에서는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기본소득 논쟁, 공적 연금 갈등, 한국 국제개발협력 정책, 전자정부와 인공지능을 둘러싼 논쟁 등 주요 사회적 쟁점들을 파악하고 올바른 정책 대안을 도출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들을 논의한다.  우선, 저자는 공공정책의 중요한 전제로서 자유와 책임을 논한다. 정치철학자 벌린(Isaiah Berlin)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위세를 떨친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지적하며 국가가 특정한 가치를 개인의 사상과 생활에 강요하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소극적 자유만을 보호할 때 진정 자유가 보호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시민들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까지가 공공정책의 과제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

삶과 죽음, 그사이 경계를 넘어 : 최기숙, 『계류자들』 (이정림)

서평 삶과 죽음, 그사이 경계를 넘어 : 최기숙, 『계류자들』 이정림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ljr0520@snu.ac.kr 얼마 전 김은희 작가의 신작이자 귀신을 소재로 한 오컬트물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던 〈악귀〉가 호평 속에서 종영했다. 〈악귀〉의 성공에서 알 수 있듯, 귀신이라는 소재는 문화 매체의 단골손님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며, 특히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물은 여름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세시풍속처럼 여겨지곤 한다. 2021년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오직 38%, 비종교인 중에선 21%만이 귀신이나 악마의 존재를 믿는다고 한다. [1] 종교의 영향력이 나날이 감소하고, 대신 과학기술이 일종의 새로운 신앙으로 떠오르고 있는 듯한 우리 사회에서, 귀신이 차지할 위치는 너무나도 좁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설문이 무색할 정도로, 〈악귀〉나 그 외 수많은 작품 속의 귀신이라는 소재에 대해 사람들은 귀신의 실재를 믿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소비하거나 생산하며 즐기고 있다. 대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귀신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최기숙의 책은 귀신이 등장하는 각종 장르의 작품들을 분석하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조금씩 다가간다. 그는 귀신을 생(生)과 사(死)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임계지에 ‘계류자’로 속해 있다고 정의하며, 귀신 서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풀어간다. 특히 귀신에 담긴 사회에 대한 성찰에 주목한다. 그는 귀신이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아이콘이자 자유와 평화의 증인이 될 수 있다며 실천적 주체로서 귀신을 해석하려 시도하고, 이러한 실천이 궁극적으로는 귀신과 포스트휴먼 사유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면모는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사례로 제시하며 이러한 관점을 조립해간다는 것이다. 귀신을 통한 ‘아시아적’ 포스트휴먼 담론을 보여주려는 최기숙의 시도는 그가 본문에서 하나의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설득력을 획득해간다. 서로 전...

지질학의 역사로부터 지질학을 이해하는 시도 : 마틴 러드윅, 『지구의 깊은 역사』 (김은형)

서평 지질학의 역사로부터 지질학을 이해하는 시도  : 마틴 러드윅, 『지구의 깊은 역사』 김은형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hhkimok1@snu.ac.kr 지질학은 천문학과 함께 대중들이 어렵지 않게 흥미를 느끼는 과학 분야 중 하나다. 지구의 나이가 45억 살 남짓이라는 것은 우주의 나이가 137억 살이라는 것과 함께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이고, 우리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전 거대한 공룡들이 지구에 살다가 소행성 충돌로 멸종했다는 이야기 역시 그 어떤 과학 지식보다 널리 퍼져있다. 유명 자연사 박물관은 재미있는 관광 장소로 꼽히며 사람들은 지질학 다큐멘터리를 즐긴다. 다른 과학 분과의 연구자라면 대중들에게 언제나 관심을 받는 지질학의 상황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틴 러드윅(Martin Rudwick)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는 대중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지질학 이야기가 그 자세한 역사 없이 전해졌을 때 오해를 만들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러드윅은 지질학에 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지구의 깊은 역사』에 부단한 사학적 노력을 담았다. 오해 없이 지질학을 소개하기 위해 현대 지구과학의 지식을 전달하는 대신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지질학자들이 ‘지구의 깊은 역사’를 발견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과학사학자이자 전 고생물학자로서, 그는 자신이 천착했던 지질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역사가 있는 어떤 종류의 과학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러드윅은 서론에서 그런 자신의 기획을 명시한다. 그는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하는 세 차례의 대혁명 [1] 에 버금가는 지구의 역사 발견 과정이 지니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인간의 위치를 변화시켰다는 것과 자연에 고유한 역사가 있음을 드러냈다는 것—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때 지질학의 역사가 가지는 두 함의는 러드윅이 이후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질학이 어떤 종류의 과학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를 발견한 지질학의 역사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실인 ‘지구가...

지식과 신화 사이에서 : 아미타브 고시,『육두구의 저주』 (황교련)

서평 지식과 신화 사이에서 : 아미타브 고시, 『육두구의 저주』 황교련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krhwang27@gmail.com 1621년 4월 21일 자정 무렵,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의 네덜란드인 거처에서 한 램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폭력의 빌미를 찾고 있던 동인도회사의 관리 마르테인 송크(Martijn Sonck)에게 이는 학살을 시작할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는 램프 소리가 자신과 네덜란드 병사들에 대한 반다 제도 주민들의 기습 공격 신호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을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시작했다. 반다 제도에서의 학살은 원활한 식민 통치를 위한 군사적 충돌이었을 뿐 아니라 값진 향신료인 육두구 나무의 열매를 독점하기 위한 네덜란드인들의 상업적 전략의 핵심이기도 했다. 반다 제도의 육두구 열매는 토착민들의 손에서 분리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상품이 되었다. 백과전서를 편집한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는 곧 “유럽의 나머지 국가들은 자국에 부족한 모든 것을 구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찾는다”라고 인정했고, 네덜란드 정물화에는 향신료가 중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59). 사회인류학 박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이 사건을 씨실로 삼아 식민주의와 환경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다양한 비판을 능숙하게 엮어낸다. 원래 이 책을 펴게 된 것은 자본주의 연구모임이라는, 작지만 생기 넘치는 학과 내 한 소모임에서였는데, 상품 경제와 환경의 관계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를 선택해 논의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글로벌 상품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책의 제목과는 달리, 이 책에서 육두구가 역사적 추적자(tracer)보다는 은유로써 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이 비인간 행위자를 면밀하게 따라가면서 그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쌓아 올리는 역사적 묘사에 있다기보다는, 어떻게 과거의 지구와 현재의 지구가 동일한 구조하에서 환경과 인간에 대한 착취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세련된 학계의 동향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