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정책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과 사례에의 적용
: 권혁주,『갈등사회의 공공정책』
정책은 정부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추진하는 구체적인 활동이다. 그렇지만 그 목적은 불가피하게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경제적 재화를 분배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기 마련이며, 경제적 이해관계 및 사회적 집단의 충돌, 또는 가치관의 대립을 수반하게 된다. 저자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의 권혁주 교수는 공공정책의 정치이론, 갈등관리, 국제개발협력 관련 주제들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이 책에서는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들이 어떻게 정책 목적에 합의할 수 있을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행정관료들은 어떤 규범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제1부에서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정책 갈등관리와 관련된 이론적 전제들을 살펴보고 사회갈등 관리를 위한 원칙과 시민의 덕목들을 제시한다. 제2부에서는 정치와 행정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적 규범으로서 책임성 원칙을 강조한다. 제3부에서는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기본소득 논쟁, 공적 연금 갈등, 한국 국제개발협력 정책, 전자정부와 인공지능을 둘러싼 논쟁 등 주요 사회적 쟁점들을 파악하고 올바른 정책 대안을 도출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들을 논의한다.
우선, 저자는 공공정책의 중요한 전제로서 자유와 책임을 논한다. 정치철학자 벌린(Isaiah Berlin)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위세를 떨친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지적하며 국가가 특정한 가치를 개인의 사상과 생활에 강요하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소극적 자유만을 보호할 때 진정 자유가 보호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시민들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까지가 공공정책의 과제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들이 필요하고 이를 준수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공동의 목적을 어떤 것으로 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저자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같은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하는 ‘공동체주의 관점’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본다. 공동체주의 관점은 논리적이고 추상적이기보다는 공동체에서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사안들에 주목한다. 시민의 권리는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를 통해 보장받아야 현실적으로 누릴 수 있으며,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여러 규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한, 각자 소유하는 재화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고 소비하는 재화가 있다. 이같은 공공재는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으로 인해 충분히 생산되거나 관리되기 어렵지만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효과적으로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 정책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주의 관점은 공공정책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주장하는 사회갈등 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공동체가 직면하는 사회갈등을 관리하고 해결하기를 위한 원칙들도 제시한다. 우선, 당사자들이 최소한의 규범을 지켜야 하며, 기본적인 갈등관리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갈등관리 역량은 자기성찰 능력, 사회 쟁점의 성격에 대한 분석과 적절한 접근 방법을 선택하는 역량을 포함한다. 또한, 토론 및 쟁점의 대상이 과학적 결정인지, 물질적 재화의 배분, 가치관, 정체성 등과 관련되어 있는지에 따라서도 그 해결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과학적 결정은 갈등 당사자의 입장과는 별개로 객관적 증거와 분석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반면, 갈등을 초래한 쟁점이 물질적 재화의 배분을 둘러싼 경제적 성격이라면, 토론은 당사자 사이의 입장을 좁혀서 타협안을 찾아내는 흥정의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갈등 쟁점이 가치관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성에 따른 토론과 설득이 필요할 것이고, 사회집단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문화적 속성에 대한 일체감, 감성적 이해와 존중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제2부에서는 정책환경의 측면에서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정관료와 이를 통제하는 정치 간의 관계에 대해 짚고 넘어간다. 정치는 행정에 대해서 정치적 또는 관리적 방안을 통해 통제를 가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 발전국가 체제는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정부이며, 경제적 성과를 통해 그러한 정당성의 결여를 메우고자 시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저자는 민주주의에 근거한 규범으로서 책임성 원칙을 제시한다. 책임성은 행정관료들이 해당 업무를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수행해야 하며, 그 과정에 대해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번역된다.
제3부에서는 지금까지 논의를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사례들의 쟁점을 살펴보고 갈등 해결을 위해 고려되어야 하는 점들을 정리하였으며, 그중에서도 6장에서 소개한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사례가 주목할 만하다. 6장에서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는 협력적 거버넌스 논의를 소개한다. 협력적 거버넌스를 위해 피시킨(James Fishkin)은 평등한 직접 참여와 균형 있는 정보 및 주장에 기초한 숙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는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에서는 모집단을 어떤 기준으로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 제시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갈등해결 과정에서 이성적 판단과 설득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해당사자 간의 합의와 흥정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공론조사에서 다루는 쟁점과 정치적 맥락에 따라 설계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공론조사를 통해서 소위 ‘만들어진 판단’이 실제 존재하는 시민들의 의견과는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그 결과가 무엇이든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결과중심주의 선언은 공론조사의 정당성을 오히려 약화하는 결과라고 보았다.
행정학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정책 갈등에 관한 이론적 전제들과 갈등관리 원칙들을 잘 정리한 책이며, 다양한 정책사례에 대한 소개를 통해 정책 추진에 있어서 갈등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과학기술정책의 특성과 책의 전반적인 구성을 고려할 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남는다. 우선, 본문에서는 정책에서 책임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에서 책임성은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공개 또는 집행에 따른 결과물을 통해서 확보할 수 있지만, 과학기술정책과 같이 그 과정이나 결과가 단기간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책임성을 쉽게 확보하기 어렵다. 본문에서는 시민의 참여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정책의 결정 과정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할 기회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정책영역과 문제들이 숙의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결될 수 없을 것이며, 이미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상황에서는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책 전반적으로 갈등을 과학기술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으로 나누어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기술적 갈등이라고 하더라도 과학기술적 지식의 생산만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지,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면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인지에 대해 보다 섬세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전문지식의 수준이 상이한 집단 간에 적절한 토론이나 합의가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특정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문가 또는 전문지식을 인용할 수도 있는데, 이를 중재하기 위한 전문가와 정부의 역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6장 사례에서 제시한 평등한 직접 참여와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숙의 과정을 강조한 피시킨의 원칙은 공론조사를 설계하고 그 결과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중요한 고려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본문에서는 공론조사를 통해서 도출된 의견이 가설적이며, 실제 시민들의 의견과는 차이가 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숙의의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약속은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공론조사 또한 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절차적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그 결과물의 정책화를 담보해야 하는지, 숙의 과정에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는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사례를 제외하고 본문에서 다룬 나머지 사례들은 대체로 한 정책을 둘러싼 쟁점들을 살펴보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실제로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당사자들 간의 합의를 끌어내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와 같은 아쉬움에도 이 책은 정책이 지니는 정치적 성격으로 인해 갈등이 야기될 수밖에 없으며, 갈등을 관리하기 위한 원칙과 함께 쟁점들에 대한 접근방식을 전반적으로 짚어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과학지식의 특수성으로 인해 갈등 양상이 복잡하게 나타날 수 있는 과학기술정책의 영역에서 다양한 성격의 행위자들이 어떻게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는 중요한 이슈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갈등관리 원칙들과 사례들로부터 도출된 시사점들은 앞으로 과학기술정책의 갈등관리 체계를 구축하는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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