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삶과 죽음, 그사이 경계를 넘어
: 최기숙, 『계류자들』
이정림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ljr0520@snu.ac.kr
얼마 전 김은희 작가의 신작이자 귀신을 소재로 한 오컬트물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던 〈악귀〉가 호평 속에서 종영했다. 〈악귀〉의 성공에서 알 수 있듯, 귀신이라는 소재는 문화 매체의 단골손님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며, 특히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물은 여름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세시풍속처럼 여겨지곤 한다. 2021년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오직 38%, 비종교인 중에선 21%만이 귀신이나 악마의 존재를 믿는다고 한다.[1] 종교의 영향력이 나날이 감소하고, 대신 과학기술이 일종의 새로운 신앙으로 떠오르고 있는 듯한 우리 사회에서, 귀신이 차지할 위치는 너무나도 좁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설문이 무색할 정도로, 〈악귀〉나 그 외 수많은 작품 속의 귀신이라는 소재에 대해 사람들은 귀신의 실재를 믿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소비하거나 생산하며 즐기고 있다. 대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귀신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최기숙의 책은 귀신이 등장하는 각종 장르의 작품들을 분석하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조금씩 다가간다. 그는 귀신을 생(生)과 사(死)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임계지에 ‘계류자’로 속해 있다고 정의하며, 귀신 서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풀어간다. 특히 귀신에 담긴 사회에 대한 성찰에 주목한다. 그는 귀신이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아이콘이자 자유와 평화의 증인이 될 수 있다며 실천적 주체로서 귀신을 해석하려 시도하고, 이러한 실천이 궁극적으로는 귀신과 포스트휴먼 사유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면모는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사례로 제시하며 이러한 관점을 조립해간다는 것이다. 귀신을 통한 ‘아시아적’ 포스트휴먼 담론을 보여주려는 최기숙의 시도는 그가 본문에서 하나의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설득력을 획득해간다. 서로 전혀 다른 소재, 주제, 장르의 작품이지만 저자의 손을 거치면 이들은 함께 융화되어 본문을 완성한다. 심지어 각 작품을 전혀 모르는 독자가 읽더라도, 저자는 속도감 있게 각 작품의 핵심적인 내용과 그 속에 등장한 귀신의 의미, 나아가 그것이 내포하는 포스트휴먼 담론을 전달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이 등장하기 때문에 자칫 글이 산만해지거나 같은 패턴이 지루해질 수도 있겠지만, 귀신의 생성, 관리, 퇴치부터 귀신과의 로맨스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다른 주제 속에서 이 사례들을 제시하여 독자들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각 작품 속 아시아 귀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향유되는지 보여주며, 귀신 담론의 특징을 분석하던 책의 방향은, 점차 포스트휴먼 담론과 귀신 담론의 연계로 넘어간다. 저자는 귀신 담론이 아시아를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공감받으며, 포스트휴먼 담론과 연결되는 ‘증폭’의 모습을 보여준다. 단순히 더 많은 이들이 향유한다는 양적인 증폭뿐만 아니라, 시간여행의 플롯 속에 녹아 있는 전통적인 귀신 담론의 패러디를 발견하며 질적인 증폭의 증거로 제시하는 모습은, 저자가 다양한 문화 매체에 대해 얼마나 자유로우면서도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자유로움, 특히 인간과 귀신, 생과 사 사이에 그어져 있던 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경계를 흐리려는 저자의 시도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저자 자신도 책을 통해 여려 경계를 넘나들 것을 선언하고 있다. 단순한 옛날이야기로서의 귀신담이나 특정 시기의 문화적 유행을 보는 대신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서사를 추구하며, 하나의 국가에만 집중하는 대신 동아시아 전체의 맥락에서 그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 심지어 글 외적으로도 대중서와 학술서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독자층에 어필하고 있고, 책에서 사례로 들고 있는 작품들도 전통적인 야담과 소설로부터 영화와 웹툰까지 그 어느 한 장르에도 소홀함이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각종 구획 사이 당연하게 그어져 있다고 생각한 경계를 넘나듦으로써, 귀신이라는 저 너머의 존재를 살피는 저자의 시도는 더욱 탄력을 받는다. 이러한 에너지는 책을 읽을 독자들과 동료 연구자들에게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온 경계들의 실체를 재성찰할 수 있도록 격려할 만한 정도이다.
다만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주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더욱 경계가 명확해진 경우도 있다. 바로 동아시아와 서양의 대조라는 구도이다. 그는 7장에서 문화가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귀신 서사가 단지 동아시아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은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귀신 서사가 담지한 동아시아의 문화와 정서가 다른 국가에도 통했기 때문인 것처럼 서술했다. 동시에 이 귀신 서사는 서양의 귀신, 혹은 과학기술로부터 파생한 SF와 대조적인 구도를 이루며 동아시아만의 특징을 더욱 강화한다. 이 구도 속에서 저자는 낭만적, 사랑, 순수, 우정, 아날로그적인 아시아와, 금속성, 우울, 자본과 탐욕, 공포의 서구권이라는 틀을 대조한다. 심지어 아시아에서 출발한다면 SF적 상상력도 아날로그적인 성향이 강해진다면서, 두 문화권 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앞서 언급했던 저자의 경계를 넘는 작업은, 이 ‘금속성의 서구 SF와 동아시아의 귀신 담론’의 구도 속에서도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저자가 서구권이라고 묶었던 집합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SF 및 포스트휴먼에 대한 서구권의 세부적인 구성을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서구권 내에서도, SF는 영미권, 특히 미국이 독점에 가깝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설령 소재나 양식은 타 국가에서도 왔을지라도 미국에서 제작된 SF에는, 마치 동아시아의 귀신담이 그렇듯 미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가 녹아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동아시아의 귀신 서사와 대조되는 것은 서구권의 SF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까? 저자가 동아시아를 아우르면서도 동시에 각 국가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귀신들의 특징을 비교했듯, 서구 내에 존재하는 여러 관점의 SF 작품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포스트휴먼과 인간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을 중심으로 영미문학에서 SF 문학이 폭발하던 시기, 프랑스나 독일 문학에서는 과학기술을 어떻게 향유했으며 그 아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이나 정서가 무엇인지 분석한다면, ‘서구권 SF’로 묶였던 영역 속의 비균질함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또한, SF의 발전은 비단 서구에서만 촉발된 것이 아니다. 특히 일본은 미국과 함께 SF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그들의 SF 문화는 미국과 다른 사유가 깃들어 있을 수 있다. 물론 일본 SF 내에도 이미 익숙한 귀신 서사가 녹아 있으며 이는 귀신 서사의 패러디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귀신 서사와 무관하게 SF에만 담긴 장르적인 특징과 그로부터 생기는 포스트휴먼적 담론들은 충분히 존재할 법하다. 서구의 SF와 아시아의 귀신 담론의 대조뿐만 아니라, 아시아, 특히 같은 국가 내에서 각기 발전해나간 귀신 담론과 SF 문화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검토를 거친다면, 아날로그적이고 낭만적인 휴머니즘의 주제가 귀신뿐만 아니라 차갑게만 보였던 금속으로부터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본문에서 귀신 담론을 통해 주로 포스트휴먼 담론에 집중한 만큼, 과학기술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이 책에 먼저 흥미를 보이겠지만, 저자의 접근은 타 과학학의 영역, 특히 과학사와도 적극적으로 연계될 여지가 많다. 저자가 강조하듯, 귀신을 비롯한 비인간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당대에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타 동아시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한국사 내에서도, 과거 수많은 야담집이나 문집에 귀신을 포함한 다양한 비인간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비인간들에 대한 당대인들의 시각이나, 이들을 등장하게 된 배경, 혹은 그들에 대한 감정이나 논의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이 충분히 쌓인다면, 당대인들이 지녔던 인간과 비인간, 혹은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었던 세계인 ‘자연’에 대한 생각과 그 변화를 한층 더 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과학사의 탐구 영역을 생(生)의 영역에 있던 인간, 혹은 금속성의 과학기술 저 너머로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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