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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밖의 현실 : 이시윤, 『하버마스 스캔들』 (황록연)

서평


이론 밖의 현실: 이시윤, 『하버마스 스캔들』


황록연
서울대학교 과학기술과미래연구센터 직원 
2021년 석사졸업 

ghkdfhrdusreal@naver.com




사회학자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은 출간 당시에 한국 사회학자들에 대한 실명 비판으로 소란을 빚었다. 책의 과녁은 적극적인 상호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학술장, 현실 참여를 이유로 학계 외부를 곁눈질하느라 연구는 뒷전인 비판적 지식인, 서구 이론을 깊이 파고들거나 세계적인 석학들과의 논쟁에 뛰어드는 대신 서구 이론의 지적 종속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탈식민’ 사회과학자였다.[1] 그의 비판이 의도대로 논쟁의 불씨를 지폈는지 아니면 속상한 사람 몇 명을 만드는 데 그쳤는지는 잘 모른다. 적어도 공부를 막 시작한 2015년 말의 내게는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서구 인문학·사회과학계는 이러이러한데 왜 한국은 그렇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해본 사람이라면 똑같은 감상을 말했을 것이다.

피상적인 감상보다 큰 결실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났다. 이시윤의 『하버마스 스캔들』은 1996년 하버마스 방한 행사에서 절정에 달한 하버마스 유행과 그 직후의 쇠퇴를 분석한 지식사회학 연구서이다. 1990년대 한국 학계가 휩싸인 비상한 열정은 어째서 그토록 빨리 식었는가? 그는 지도교수인 김경만과 마찬가지로 부르디외의 장(場)이론을 통해 해답을 찾았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학술장의 구성원은 외부의 관점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특수한 주제에 몰입하여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동료이자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경쟁자들의 공동체를 이룬다.

부르디외는 학술장을 주변부와 중심부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쓰이는 전략을 설명했는데, 이시윤은 이 설명에 암시된 두 가지 전략을 구체화하여 학술장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목한다. 첫째는 주로 학술장 중심부 엘리트가 사용하는 전략인 딜레탕티즘이다. 이를 택한 학자는 깊이가 떨어지는 지식을 넓은 주제에 적용하는 딜레탕트가 되어 자신의 지위를 재생산한다. 둘째는 학문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인 학술적 도구주의이고 주로 학술장 주변부에서 나타난다. 주변부의 학자들은 현실에 쓸모가 있는 지식을 제공하리라는 약속으로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지만, 그 결과 장 내부에 몰입하지 못하고 장 외부에 끌려다닌다. 부르디외가 이상적이라고 간주한 학술장의 특성은 두 악덕의 반대편에 있다. 딜레탕티즘과 짝을 이루는 것은 좁고 깊은 지식을 생산하는 전문주의이며, 도구주의의 짝은 탐구의 목적을 학술장 자체에 두는 아카데미즘이다.

이시윤은 이러한 이론적 틀을 견고하게 제시한 뒤 1970년대에서 시작하는 한국 학계의 긴 역사로 초점을 이동한다.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 대학교의 수와 입학 정원은 크게 늘었지만, 학회나 학술지로 구성된 학술장은 정착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학자들의 궤적은 딜레탕티즘과 도구주의로 분화되었고, 당시의 하버마스 수용도 두 갈래를 따랐다. 주류 학자들은 하버마스의 실천적 면모를 소거하고 지성사의 맥락에서만 다루었다. 비주류 학자들은 하버마스를 마르크스의 뒤를 이은 비판적 이론가로 파악했다. 두 부류는 하버마스 자체에는 실질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사했다.

그러나 학술 운동에 참여한 학자들은 1990년대 공산권의 붕괴, 자유화, 세계화라는 격변의 한가운데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을 찾는 과제에 맞닥뜨렸다. 이시윤이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비주류 학술 운동 출신의 신진 하버마스 연구 그룹이다. 이 그룹은 언어적 전회 이후 하버마스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탁월한 성과를 냈고, 경쟁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만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중심부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나아가 이들은 중심부 딜레탕트의 이목까지 끌어 특정한 관심사로 통합된 학술 공간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신진 연구자 그룹, 제도권의 학자들, 그리고 일부 좌파 학자들로 이루어진 하버마스 네트워크는 학술 행사나 학술지 특집호를 기획하는 등 활기를 띠었다.

이시윤은 하버마스 방한 행사까지는 하버마스 연구 학술장이 미약하게나마 존재했다고 본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구성원 가운데 1990년대 말이 지나서도 하버마스를 연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원인은 네트워크 자체가 기실 상호 인용과 비판이 적은 약한 연결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완성되어 있지 않은 장은 구성원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하버마스에 대해 비판적 관심을 유지하던 도구주의적 학자들이 떠났고 다음으로 딜레탕티즘적인 주류 학자들이 다시금 유행을 좇아 발길을 옮겼다. 최후에는 신진 하버마스 연구 그룹까지 손을 떼며 하버마스 네트워크는 해체되었다

이시윤은 신진 연구자 그룹이 전문적인 탐구를 이어나갔을 경우 “한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태동시켰을지 모를 일”이라는 상상으로 책의 본문을 끝맺는다(465). 일견 씁쓸한 감상으로 치부하기 쉬운 이 말은 사실 공격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본문 이후의 짧은 절에서 명시하듯(476-483), 그는 한국 학술장의 실패를 제도나 사회경제적 구조와 같은 요인에서 찾는 시도를 거부하고 학자들에게 직접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시윤은 한국 사회학자들의 철저한 반성을 촉구한 김경만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럼에도 책의 결론은 거론된 학자들이나 후속 세대의 학자들에게 상당히 잘 수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사례 연구가 탄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윤은 한 시대를 망라한 듯한 양의 사료를 동원하고, 하나의 주장을 펼칠 때마다 필요한 근거를 꼼꼼하게 살핀다.

그러나 나는 책의 주장과 입장에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시윤은 학술장이 부재한 경우 학자들이 경쟁적인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장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장의 정립이 이뤄지지 않은 한국의 경우에는”(384) 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장 내부의 경로도 없으므로, 딜레탕티즘과 도구주의가 학자들로 하여금 “하버마스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게 만든 강력한 외적 유인”(383)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요컨대 장은 학자들이 책임지고 형성해야 할 대상이지만, 장이 없으면 학자들은 장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에는 명확한 답이 제시되지 않는다. 학자들의 무능함을 비판하려는 의도와 학자들의 무능을 견인하는 구조적 원인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서로 충돌할 뿐이다. 또 다른 충돌은 학계의 정량화된 실적 평가 시스템인 ‘학진 체제’를 둘러싸고 발생한다. 결말 부근에서 이시윤은 학계의 부침이 평가 시스템에서 비롯된다는 식으로 외부의 원인을 찾는 시도를 비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학진 체제는 1990년대의 학자들이 학술장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한 원인 중 하나로 몇 차례에 걸쳐 언급된다. 여기에서도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의도와 구조에 책임을 묻는 의도가 충돌한다.

이시윤이 이러한 불협화음을 해명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로 수렴된다. 학진 체제와 장의 형성 과정은 부르디외의 이론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인 학술장의 상징투쟁에 관한 설명에서 학진 체제와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요소는 (적어도 부르디외의 이론을 제시하는 2장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장의 정립이라는 문제는 더욱 명확하다. 이시윤에 따르면 부르디외의 장이론은 장이 있다는 전제하에 장의 재편과 재구조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었으므로, 학술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의 환경과 차이가 있다(135). 즉 부르디외는 장의 형성을 논하지 않았다. 장이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고 그 과정은 어떠한지를 배제한 채로 한국의 학자들이 장을 만들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이에 관한 설명이 생략된 이유를 추측하자면, 아마도 부르디외 이론의 공백을 차마 직접 채워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윤의 의도는 부르디외의 체로 한국의 학계를 걸러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체와 맞지 않는 현실은 틈새를 빠져나간다.

현실의 사건이 특정 이론의 사례임을 증명하는 연구를 볼 때마다 이론의 지위에 관해 생각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 또한 이론을 한 번이라도 만족스럽게 다루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론이 전능한 신의 계획처럼 활용되는 방식이 부적절하다는 확신만은 있다. 그와 같은 사례 연구에서 이론은 최소한 그 범위로 규정된 뜰 안에서는 인간의 앞날과 현실화하지 못한 가능성을 모조리 알려 주는 계시로 기능한다. 신의 계획을 따르는 자에게는 영광과 구원이 보장된다. 그리고 신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제 운명을 알지 못하고 추락하는 전통적인 비극이 기다린다. 저자가 책의 본문 마지막과 결말부, 학자들이 부르디외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을 경우 이르렀을 가능성을 그려 보며 안타까움에 젖는 것은 그런 관점의 발로이다. 현실이 이론의 사례임을 확인하는 연구는 전능한 이론이라는 정답을 아는 주체의 자리에서 행위의 정오를 판정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누구도 현실 바깥에 서서 관찰하는 진리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위치는 언제나 현실 내부에 자리하며, 따라서 현실은 언제나 이론보다 풍성하게 흘러넘친다. 우리가 단정할 수 있는 원칙은 이것뿐이다.

[1]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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