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사를 여행하는 페미니스트를 위한 안내서*
조희수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heesoo.cho@snu.ac.kr
1. ‘이런 게’ 과학사 연구가 됩니다
“이런 게 과학사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학부생 시절, 〈과학사〉 수업 기말 과제 발표 시간에 한 남학생은 나의 발표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과학사를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미리 전공 지식을 쌓고자 〈과학사〉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는데, 기말 과제로는 2017년 한국에서 한창 이슈가 되었던 생리대 유해 물질 파동에 대한 여성들의 대응에 대해 다루던 참이었다. ‘전쟁과 과학기술’을 자신의 기말 주제로 다루려고 했던 그 남학생의 말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보자면 이렇다. “‘전쟁’처럼 사람이 죽고 사는 ‘중요한’ 일도, 총기나 대량 살상 무기처럼 ‘누가 봐도’ 과학기술인 주제도 아니고, 고작 여성들의 월경과 같은 ‘사소한’ 주제가 과학사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게 계기였을까? 과학사를 접하고 가장 처음으로 읽었던 책이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 론다 쉬빙어(Londa Shiebinger)의 『자연의 몸』(Nature’s Body)이었고 페미니즘과의 만남이 내가 과학사를 전공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음에도, 본격적으로 과학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후 석사 학위 논문 주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나는 여성과 관련된 주제를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1]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고작 그 남학생의 말이 아니었다.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여성과 관련된 주제를 택하면 ‘진지하게’ 과학사 연구를 하는 연구자로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는 내 안의 불안이 가장 큰 이유였다. 외국 학계에는 이미 날고 기는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들이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주변 선생님들도 페미니스트 과학사는 중요한 분야라고 말씀해주셨지만, 국내에는 읽고 따라갈 만한 페미니스트 과학사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2] 이런 상황에서 여성과 관련된 주제를 연구하겠다고 나서면 ‘(페미니스트)과학사학자’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과학사학자)’로만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현대 한국 산과학에서 산전 초음파 진단의 보급과 임신 경험의 변화」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1년 넘게 한 주제를 가지고 씨름할 텐데, 쓰는 동안 지치지 않고 세상에 내놓았을 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결국 나에게 가장 의미 있고 재미있는 주제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과학학 연구들이 나에게 울림을 준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울림을 주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심정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몇 없는 페미니스트 과학사 연구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페미니스트 과학사’라는 분류에만 매달리지 않고 시야를 넓혀 인접 분야에서 실마리를 얻어가며 연구를 해나갔다.
이 글은 내가 과학사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나의 고민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준 연구들을 한국 사례를 중심으로 다음의 세 가지 문제의식 아래 정리한 것이다. 첫째, 페미니스트 과학사 연구는 그동안의 역사 서술에서 누가 과학의 주체로 여겨졌는지, 누가 배제되어왔는지를 보인다. 둘째, 페미니스트 과학사 연구들은 지금까지의 역사 서술에서 무엇이 과학이라고 여겨왔는지를 질문하고, 과학의 새로운 정의를 제시함으로써 그간 조명받지 못했던 실천들을 과학의 범주 안에 포함한다. 셋째, 페미니스트 과학사 연구는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를 고찰하며,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원하는 과학은 어떠한 모습인지를 고민한다.
다만 이 글은 페미니스트 한국과학사의 통사(通史)가 아니다. 나는 나와 함께 과학사를 여행할 페미니스트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 「과학사를 여행하는 페미니스트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내가 선행 연구자들과 관계 맺은 방식을 소개하고 동료들을 페미니스트 과학사로 초대하고 싶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자가 나와 함께 페미니스트 과학사 연구에 동참하여 이 글을 함께 수정하고 보완해나가면 좋겠다. 특히 한국의 사례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이 더 다양한 논의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3]
2. Who: 누가 과학의 주체이고, 누가 과학에서 배제돼왔는가?
미국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페미니스트 과학학은 ‘과학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이라는 전제에 반기를 들고 그간 과학 지식이 성·계급·인종 차별적인 토양에서 만들어져 왔음을 지적하였다(황희숙, 2012). 그러한 흐름 중 하나로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들은 바버라 매클린톡(Barbara McClintock)과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등 잊힌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을 되살려냈는데, 이들에 관한 연구는 당대 여성 과학자들이 놓여 있었던 불평등한 현실을 드러낸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과학 연구에 매진해 훌륭한 성과를 거둔 여성 개인의 이야기를 과학의 역사 안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주디 와이즈먼, 2004: 29).
그렇다면 한국사에서 여성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호명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프랭클린과 매클린톡과 비슷한 시기, 식민지 시기 조선 여성으로서 과학 연구의 꿈을 놓지 않았던 김삼순의 생애에 관한 선유정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조선 땅의 조선인에게는 과학 분야에서 제대로 된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이 과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지원을 받아 해외로 유학을 가야만 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여성인 김삼순이 과학 공부를 시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선유정의 연구에서는 당시 김삼순이 조선인 여성 과학자로서 겪어야 했던 중층적인 차별이 일본인 여성 과학자 쓰지무라 미치요와의 비교를 통해 잘 드러난다. 김삼순과 쓰지무라 미치요는 당대에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성 과학자’로서 자신의 꿈을 이어나가려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조선인 김삼순은 일본인 쓰지무라와는 달리 제도적 차별을 추가적으로 겪어야 했다(선유정, 2021).
물론 선유정의 연구에서 김삼순이 겪은 어려움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김삼순은 식민 지배와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고난 아래에서 과학 연구를 이어갔을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이후 자신의 연구를 세계적인 과학 잡지에 실었을 정도로 높은 학문적 성취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66년에 57세의 나이로 ‘한국 여성 농학박사 1호’가 되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그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면서까지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얻은 결실이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김삼순의 연구 궤적은 그가 한국 균학계의 초기 연구자로서 학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데, 그는 서울여자대학 식품영양학과에서 균학 연구를 시작해 느타리버섯 재배기술의 국산화에 성공하였고 느타리버섯 연구 과정에서 형성된 연구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 균학회가 설립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선유정, 2021; 선유정·김근배, 2022a; 선유정·김근배, 2022b; Sun, 2019).
현대 한국 과학사에서 김삼순에 관한 연구가 여성 과학자에 관한 연구로는 거의 유일한 사례인 것과는 달리, 의학 분야로 눈을 돌려보면 그래도 좀 더 많은 여성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의학사에서 그나마 여성 의료인에 관한 연구가 좀 더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과학계보다는 의학계가 조선인 여성들에게 그 문을 좁게나마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받으며 경제활동을 할 방법이 드물었던 시기에 의사, 간호사, 산파(조산사)로서 활동해온 여성들은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영역을 만들어나갔다(박윤재·이현숙·신규환, 2017). 이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인 여성들을 의료인으로 양성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덕분이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은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여 여학생들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의 청강생으로 교육받을 수 있게 했고, 1928년에는 길정희·김탁원 부부와 함께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이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창설하여 여성 의사 육성에 힘썼다(김상덕, 1993; 이영아, 2021).
그러나 의학이 이렇게 여성들에게 자리를 할애하였던 것은 의학계가 과학기술계보다 성평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학 내에 성별에 대한 구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돌봄’이 동반되는 의학의 경우 과학과는 달리 여성들이 나름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임신부나 여성·어린이 환자들을 마주해야 하는 산부인과나 소아과에서 ‘모성을 가진 여성’들이 유리할 것으로 여겨져 가장 먼저 여성 의사와 간호사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는데, 이는 이후 여성 의료인들이 한국 의료계에서 활동 분야를 넓혀가고 그 기여를 제대로 인정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Kim, 2019).
김삼순에 관한 연구에서 그가 ‘최초의 한국인 여성 농학 박사’였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듯이 전문 의료인 여성들에 주목한 연구 역시 주로 ‘최초의 여성’ 타이틀을 획득하였거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과 굳은 의지로 의료인의 자격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여성들을 다뤄왔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였던 김점동(박에스더)(이방원, 2007; 정민재, 2009; 윤선자, 2014),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허영숙(신동원, 2012), 한국 최초의 간호사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이꽃메, 2019), 최초의 국내파 여성 의사 김영흥·김해지·안수경(이영아, 2021) 등에 관한 연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료인으로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인 여성 지식인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여성 의료인들이 그 대표 격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서 근우회와 여성의학교 설립 운동에 참여한 유영준, 역시 근우회와 조선간호부협회 설립에 참여한 한신광이 그 예이다(이꽃메, 2006; 이희재, 2022).[4]
해방 이후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 과학기술자나 의사들이 겪어야 했던 피지배민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사라지고 한국인들이 세계적인 과학기술 무대에서도 큰 성과를 올리게 된 지금에도 과학기술, 의학 분야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여전하다. 이러한 가운데 그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왔던 여성의 이름을 복원해내는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작업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굳센 의지와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이 처한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힘썼음에도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남김으로써, 한국의 과학·기술·의학이 지금의 수준에 이른 것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뤄온 성취의 결과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간 이뤄진 작업에서 보완해야 할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여성 과학기술인이나 의료인을 다루는 저작이 아직 다양하지 못한 가운데, 주로 몇몇 뛰어난 여성 개인의 노고와 성과를 기록하는 데 초점을 두는 보완사(compensatory history)나 공헌사(contribution history)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이영아, 2021). 뛰어난 성과를 올린 여성 개인에 주목하는 방식으로만 역사가 기록되는 것만이 지난 역사 속의 여성들을 기록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간 이뤄진 작업에서 보완해야 할 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5] 그러나 여전히 한국 과학사·기술사·의학사에서 여성 개인에 관한 발굴과 조명이 충분하게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성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앞으로는 여성 과학기술인이나 의료인에 대한 연구가 양적 팽창과 더불어 서사적 다양성 역시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함은 분명하다.
3. What: 무엇이 과학인가?
‘과학기술’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반도체, 물리학, 전기자동차? 그럼 이건 어떨까. 요리, 양육, 돌봄, 바느질. 이것들이 ‘과학기술’의 범주에 들어갈까? 아마 어색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전자와 같이 ‘남성적’이고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지식을 요구할 것처럼 보이는 것은 흔히 ‘과학기술’로 여겨지지만, 후자와 같이 ‘여성적’인 것은 과학기술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들의 또 다른 성취 중 하나는 오래전부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백인, 남성,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의 구분 역시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과학기술의 정의는 계속해서 변화해왔음을 지적해온 것이다. 즉, 흰색의 실험복을 입은 남성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과학 지식을 만들어내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남성 기술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발명해낸다는,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상이 만들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것이다(Creager, Lunbeck & Schiebinger, 2001: 1-22). 물론 이러한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들의 외침은 ‘무엇이든 과학기술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시해온 ‘과학기술’의 정의가 주로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해 왔는지, 그리고 과학기술의 정의를 넓힐 때 누가 그 안에 새롭게 등장할 수 있는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과학기술과 여성』은 한국 여성의 과학기술 실천의 역사를 다룬 최초의 단행본으로, 조선시대부터 근대이행기까지 한국 여성이 일상적으로 수행해온 실천들을 ‘과학기술’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의 이러한 시도 안에서 과학기술은 “물적 대상을 체계적이고 합목적적으로 변화시키는 일련의 실천”(김영희 외, 2019: 29)으로 규정되고 그간 과학기술의 역사 안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농업, 의·식·주 관련 활동, 의료, 한글 분야에서 나타나는 한국 여성들의 실천은 과학기술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 책은 이를 통해 “여성들이 수행해온 다양한 실천들-많은 경우 기술 실천은 고사하고 ‘실천’으로도 이름 불리지 못한 실천들-을 ‘기술’로 호명”함으로써 가시화하고, “이런 호명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들과 연구 성과를 재해석하고 재기술(再記術)”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김영희 외, 2019: 10).
앞서 살펴보았듯 시대적 한계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여성 개인에 주목한 연구들이 과학기술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성취를 다시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렇게 과학기술을 재정의하는 작업은 여성 다중(多衆)을 과학기술의 또 다른 행위자로 자리매김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여성을 과학기술의 역사 안으로 불러오는 일에도 이바지한다. 가령 『한국의 과학기술과 여성』 후반부에서는 식민지 조선 시기 여성 미용사의 사례가 다뤄지는데,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대로라면 이 미용사들은 과학사 서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과학 이론을 제시한 과학자도, 새로운 기술이나 기기를 발명하는 발명가도, 과학 지식을 배워 응용하는 기술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새롭게 정의한 과학기술의 범주 안에서 평범한 미용사들의 노동은 중요한 과학기술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우리는 이들을 선배 미용사와 같은 미용 기술 전문가나 공식 교육기관으로부터 전문 지식을 배워 식민지 조선의 모발 위생에 개혁을 불러일으키고 파마약이나 컷팅 기술 등 최신 미용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하는 기술 도입의 주역으로서 다시 읽어낼 수 있다(김영희 외, 2019: 387-390).
이러한 접근법은 최근 과학사 분야에서 과학자나 기술자, 의료인 등의 전문가가 아니라 사용 기술과 사용 기술의 사용자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연관된다. ‘사용 기술(technology-in-use)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데이비트 에저턴(David Edgerton)은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The Shock of the Old)에서 그간 혁신 중심의 미래주의적 관점에서 기술의 역사를 서술해 왔던 것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용 기술과 그 사용자들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일 때 발명과 혁신,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더 넓은 지역의 역사, 소수자의 역사에 귀 기울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콘돔이나 자전거, 대포와 총과 같은 사용 기술에 주목한 바 있다. 기술이 어느 한 지역에서, 어느 한 집단에서만 사용되어 온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어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방식의 접근법이 지난 시기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 법이라 할 것이다(데이비드 에저턴, 2015).
다만 이렇게 여성을 기술의 사용자로 보는 관점이 남성을 기술의 생산자로, 여성을 기술의 사용자로 보고 둘 사이에 위계나 선후 관계를 두는 전통적인 관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기술사학자 루스 올덴지엘(Ruth Oldenziel)이 강조하였듯 여성 사용자들은 단순히 남성 생산자가 만든 기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자가 아니라, 기술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기술의 확산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기술의 생산자가 처음에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생산자의 의도를 전복시키기도 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기술의] 사용자와 소비자는 기술을 만드는 적극적인 참여자이며, 순종적인 행위자나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닌 것이다(Oldenziel, 2001: 135). 올덴지엘의 서술에서는 기술의 사용자와 생산자 간의 위계는 물론 구분까지도 허물어지는데, 이때 사용자 역시 기술을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술을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그려진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여성들이 월경, 피임, 질 분비물이라는 세 가지 신체적 경험과 관련해 활용한 기술을 살펴보고 기술의 사용자인 여성들의 역할이 한국에서 여성 기술(feminine technology)의 다양한 풍경이 구성되는 데 주요했음에 주목한 이영주의 연구는 기술 사용자로서 여성들의 다양한 측면에 주목한 대표적인 연구이다. 이영주에 따르면 여성들은 여러 기술의 개발자나 제품의 제조사, 의사들의 조언에 순응하며 그를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여러 기술적 가능성 사이에서 자기 몸과 상황에 맞추어 적절한 기술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조정해나가는 능동적인 참여자였다. 여성 사용자들의 조정 과정은 저자가 주목한 여성들의 세 가지 경험 중 질(膣) 분비물과 관련된 기술의 활용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이는 질 분비물이 월경이나 피임과는 달리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 기술을 통해 필수적으로 대응해야만 하는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다양한 질 세정제가 등장하고 그러한 제품들의 광고와 의사들의 조언 등이 쏟아진 것은 사실이나, 이영주는 그러한 외부적 요소가 여성들에게 늘 효과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음에 주목한다. 몇몇 여성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질 세정제의 사용을 시도해보았지만, 이러한 기술이 자기 몸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 때는 그 사용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기술을 활용하거나 거부하고, 각자의 판단에 따라 기술 풍경을 바꿔 나가는 능동적인 행위자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Lee, 2022).
기술 사용자로서 여성의 역사에 대한 논의를 최근까지 끌고 와본다면 2000년대 이후 한국 여성들의 ‘셀카’ 실천의 역사를 다룬 김지효의 연구 역시 그중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소소한, 또는 ‘한심한’ 여성적 취미 정도로 여겨졌던 셀카를 199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까지 한국의 인터넷 문화의 변천사와 함께해온 주요한 기술로 자리매김하고 그러한 셀카 문화를 이끌어온 여성들이야말로 인터넷 문화의 변화를 추동한 ‘얼리어답터’였음을 보인다. 그에 따르면 셀카 문화는 (1) PC·하두리캠-카메라폰·디지털카메라-스마트폰·DSLR이라는 촬영 및 보정 기기의 변화와 (2) 세이클럽-버디버디·얼짱카페·싸이월드-페이스북-인스타그램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변화, (3) 연예인 캐스팅에서 개별 인플루언서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상업화 시장의 변화라는 세 가지 축이 만나며 만들어지고 변화해온 것인데, 2000년대 이후 인터넷 기술의 사용자로 등장한 한국 여성들이야말로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행위자이다. 지금까지 ‘셀카’를 다룬 연구들은 여성들을 ‘외모 지상주의’의 늪에 빠져 그저 주어진 기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수용자로만 바라보았지만, 이 연구에서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셀카 기술을 습득하여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셀카를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 제작·유통·수정해가며 ‘셀카 문화’를 자신들의 놀이 문화로 만들어 온 주체임을 보여준다(김지효, 2023: 25-51). 전 세계가 주목한다는 한국의 인터넷 문화, 그리고 그러한 인터넷 문화의 변화에 힘입어 발달한 K-뷰티와 K-엔터테인먼트는 한국 여성들이 주도해온 셀카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 여성들의 셀카 실천을 새로운 기술 실천으로 주목할 때 한국 인터넷 문화의 역사가 더 다양하고 흥미로워질 것이다.
4. How: 과학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우리는 어떠한 과학을 원하는가?
앞 절에서는 과학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사용 기술과 여성 사용자의 실천에 주목하여 다양한 여성 다중의 실천을 과학사 안에서 논의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럼, 이러한 연구들이 최종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여성이 자유롭게 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일까? 다시 말해, 새로운 과학사 서술에서 질 세정제와 같은 여성 기술을 활용하는 여성, 셀카를 찍는 여성은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기술을 선택하는 주체로만 그려지는 걸까?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 질문이 내가 석사 논문을 쓰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나의 석사 논문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한국 산부인과에서 산전 초음파 기술의 도입과 정례화가 산과학 지식과 여성들의 임신 경험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관한 역사 연구이다. 석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을 당시 나의 문제의식 역시 그동안 과학기술의 수동적인 수용자로만 받아들여졌던 여성을 소비자로 호명함으로써 한국에서 산전 초음파 진단이 정례화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여성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여성학의 전통적인 논의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여성학의 전통적인 논의에서는 여성의 임신, 출산과 관련해 사용되는 재생산 기술(reproductive technology)에 여성 억압적인 성격이 있다고 파악해 왔다. 재생산 기술 중에서도 특히 초음파 기기에 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된 편인데, 보통 이들은 산과학에서 여성보다는 태아의 존재를 강조하는 데 일조하여 산과학에서 여성의 경험과 건강보다는 태아의 건강에 주목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2021; 앤 마리 발사모, 2012: 135-190; 주디 와츠맨, 2001; Oakley, 1984).
그러면 내가 바라본 현대 한국의 풍경은 어땠을까? 나는 한국에서 산전 초음파 진단이 1980~1990년대에 태아 성감별을 위하여 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1980년대 초, 산전 초음파 진단을 통해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여성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그동안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꼼짝없이 임신과 출산에 매달려야 했던 한국 여성들이 초음파를 통해 아이가 아들인 것을 확인하고자 병원으로 몰려간 것이다. 당시 초음파를 통한 태아 성감별이 법적으로 금지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진단을 거부하는 의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매달리는 방식으로 그들을 회유하려 했고, 때로는 동네 여성들이나 친척들의 이름을 들며 의사를 협박하기도 했다. “이 병원은 초음파 안 봐준다”라고 소문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여성들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국의 산부인과 병·의원에는 초음파 진단기가 필수적으로 갖춰지게 되었는데, 이는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산전 초음파 진단의 정례화에서 여성의 역할이 주도적이었음을 보여준다(조희수, 2021).[6]
이는 페미니스트 과학사 서술의 또 다른 고전으로 꼽히는 프란체스카 브레이(Francesca Bray)의 『기술과 젠더』(Technology and Gender)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브레이는 11세기부터 18세기 중국의 가옥, 직조(織造), 피임 기술의 역사를 들여다봄으로써 기술의 사용과 당대 중국의 사회적 체계의 형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인다. 그의 연구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1997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11세기에서 18세기를 살아간 중국 여성들의 삶을 최대한 다양하게 포착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가령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에서는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낙태하기 위해 월경을 유도하거나 아이를 갖는 것을 도와주는 재생산 기술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때 여성들은 자신의 재생산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물론 상류층 여성이 하층 계급 여성의 재생산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재생산 기술을 사용하였는데, 저자는 여성들의 재생산이 계급화된 사회 질서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여성 개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기술을 선택함을 보여준다. 즉, 브레이는 여성 다중의 기술 선택을 그가 놓인 사회경제적 조건과 능동적으로 협상한 결과로 바라보고, 이들을 자기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기술을 활용해나갔던 주체로 그려내는 것이다(Bray, 1997). 브레이의 영향을 받은 나의 연구에서도 한국 여성들은 기술이 갖는 권위에 압도되기보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초음파 기술을 선택하고, 사회적 비난을 무시하거나 의사와 협상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이들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당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가령 이 여성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태아 성감별을 했다는 것은 이들이 분명히 당대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여성 사용자를 기술사용의 능동적인 주체로 보려는 시도는 여성 사용자의 기술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영향을 완전히 소거하지 않고, 오히려 기술과 여성의 삶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술과 여성 간의 관계는 계속해서 바뀐다. 나의 석사 논문 마지막 장에서 다뤄지는 1990년대의 풍경은 1980년대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데, 1990년대에는 이전에 비해 산전 초음파 진단이 임신한 여성의 산전 관리 과정에서 정례적인 절차로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임신 과정에서 겪는 당연한 절차로서 산전 초음파 진단을 경험한다. 이 시기 한국 여성들이 겪는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기형아 진단’의 가능성인데, 이제 대부분의 임신부가 산전 초음파 진단을 통해 태아의 건강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산전 초음파 진단을 통해 기형아를 ‘예방’하는 것이 임신부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가 된 것이다. 이제 임신 중에 ‘아기가 아들인지’, ‘아기가 잘 크고 있는지’, ‘아기 몸에 이상은 없는지’, 심지어 ‘아기에게 다운증후군의 가능성이 있지는 않은지’를 초음파로 확인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었는데, 이렇게 여성들이 초음파를 통해 태아의 성별과 상태, 미래의 장애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것은 산전 초음파 진단이 한국에 등장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천이다. 산전 초음파 기술은 ‘아들 출산’의 끝없는 압박으로부터 한국 여성을 자유롭게 한 기술인 동시에 한국의 출생 성비를 불균형하게 만든 기술이고,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 여성들을 진단에 매달리게 만든 기술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학자로서 나의 마지막 고민은 이 기술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기술사용의 다양한 결과를 제시하는 데서 나의 고민을 끝낼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내가 기술의 과거를 그리는 일이 기술의 미래를 제시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에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역시 앞선 연구자의 발자취였다. 20세기 후반 미국 여성사 분야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한 역사학자인 거다 크론슈타인 러너(Gerda Kronstein Lerner)는 1982년 4월 1일 미국사연구회의 회장 취임사에서 역사가의 역할로서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이를 현재의 새로운 문제들에 비추어 재해석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 만들기(history-making)’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가가 창조한 모형은 증거에 부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상상력을 장악하여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지녀야 합니다. (……) 그러므로 역사 만들기는 창조적인 기획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 기억의 단편들과 과거의 선택된 증거에서 현재에 의미를 갖는, 정합적인 과거 세계에 대한 정신적 구성물을 형성합니다. (……) 우리는 우리가 구성한 과거에서 한때 어떤 가능성과 선택들이 존재했는지를 배웁니다. (……) 이는 다시 우리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설계할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역사 만들기를 통해 현재는 필연성에서 해방되고 과거는 사용 가능하게 됩니다.”
러너의 말처럼, 역사학자가 그려내는 과거에서 우리는 한때 어떤 가능성과 선택들이 존재했는지를 배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계는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갖게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장민제·신인호·임소연(2021)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저자들은 1960년대부터 정착하기 시작한 한국의 ‘버스 안내양 제도’와 1980년대 중후반 버스 내 기계음성안내장치의 보급 사이의 연속성을 다루며 버스 안내 음성이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상냥한 버스 안내양’을 기대하였던 당시 사람들의 고정관념에서 기인한 것임을 지적한다. 저자들의 작업은 버스 안내 음성의 과거를 그려내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글의 말미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일이 젠더 중립적인 안내 음성의 개발과 같은, “여러 현상에 잠재하는 편견과 차별을 찾아내어 수정”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러너가 강조한 것처럼, “역사 만들기를 통해 현재는 필연성에서 해방되고 과거는 사용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산전 초음파 진단의 역사에 관한 필자의 고민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산전 초음파 진단이라는 기술이 지금의 이러한 방식대로 사용되는 곳은 오직 한국뿐이며, 이는 우리가 그 기술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산전 초음파 진단 사용의 역사를 통해 이 기술이 지금과 같은 방식대로 사용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은 이 기술이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해보게 한다. 한국에서 산전 초음파 진단은 왜 생물학적 성별, 장애 여부를 가려내는 기술로 사용되었을까? 산전 초음파 진단이 무엇을 가려내는 기술이 아니라 여성과 태아의 건강을 위해 사용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고민함으로써 우리는 과학의 역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과학의 미래를 그리는 작업에 도달한다. 즉, 페미니스트 과학사학자의 ‘역사 만들기’를 통해 현재의 과학은 필연성에서 해방되고, 과거는 미래의 과학을 만들기 위한 발판이 되는 것이다.
5. 과학사를 함께 여행할 페미니스트를 기다리며
“이런 게 과학사의 주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로 시작한 이 글은, 과학사를 함께 여행할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런 게 과학사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를 보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과학, 기술과 의학의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한층 더 흥미로운 쟁점을 다룰 수 있다. 그동안의 역사 서술에서 누가 과학의 주체로 여겨지고 누가 배제되어왔는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역사 서술에서는 무엇이 과학이라고 여겨왔는지를 질문함으로써 과학의 역사를 다시 한번 비틀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고찰하고, 앞으로 우리가 원하는 과학은 어떠한 모습인지를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다. 그러나 여전히 과학과 기술, 의학은 전문 지식을 가진 일부 전문가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그 안에 여성들의 자리는 여전히 좁아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과학과 기술, 의학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단순히 지난 시기의 빛나는 성취를 기록하고 찬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배제되어 왔던 소수자의 목소리를 되살리고 그들에게 힘을 되찾아 주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게’, 과학사의 주제가 될 수 있고, 우리는 이러한 과학과 기술, 의료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역사학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과거의 역사 서술을 바꾸고 앞으로의 기술의 미래를 제시하는 일에 당신도 함께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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