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담
과학학과 몸 연구: 라운드테이블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최석현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박사과정
최석현: 반갑습니다. 저는 『사이』의 편집장 최석현입니다. “몸” 특집인 이번 『사이』 제2호에서는 대학원생 대담 세션을 마련했습니다. 과학학과에서 몸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는 박사과정 대학원생 네 명이 모여 과학학 전공자로서 몸 연구를 한다는 것에 대한 소회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각자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민병웅: 안녕하세요, 민병웅입니다. 저는 인종에 관한 과학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왔습니다. 저는 피부색을 가지고 사람들을 다른 유형으로 나누는 오랜 사고 방식이 어떻게 기원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학부 때 제국주의 관련된 수업 등에서 공부하다 보면 항상 따라나온 것이 과학적 인종주의, 19세기와 20세기의 인종 과학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학부 수업에서 인종 과학이라는 표현 자체를 쓰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인종을 객관적인 과학적 개념으로 만들어 낸 역사에 대해 비판하는 연구를 많이 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과학 자체에 대해, 어떻게 그런 과학들이 실제로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가시화하는지, 그런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석사 논문을 1950~60년대 한국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에 대한 연구로 썼습니다. 그런데 피부에 관한 논의를 계속 쫓아가다 보니까 피부의 문제라는 게 단순히 색깔의 문제만을 포함하는 게 아니라, 피부 자체를 매개로 다양한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피부색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여러 실험들을 보기 위해 박사 논문 주제로는 화장품 산업의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원래는 한국의 화장품 산업과 소위 “K-뷰티”가 어떻게 다른 지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인종주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보고 싶었고, 또 거기에서 한국의 K-뷰티 문화와 서구 문화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싶었는데요. 그 얘기까지 하기 위해 봐야 하는 화장품 산업과 그 산업을 매개로 이뤄지는 시장 내에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직 무수히 많이 쌓여 있어서 거기까지 언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의 개인적인 관심과 동기는 이렇고요. 기본적으로 저는 몸 중에서도 피부라는 신체 부위를 보는 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김연화: 안녕하세요, 김연화입니다. 저는 이공계 대학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의 실천을 탐구하는 실험실 연구(laboratory study)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석사논문도 실험실 연구로 썼는데, 당시 경락의 과학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을 하고 실험방법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보면서, 실험이 반복될수록 과학자의 몸에 새겨지는 연구대상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몸에 새겨지는 감각과 과학적 실천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생겨났습니다. 한편, 감각하는 몸이라고 하면 주관성이 강한 것으로 인식되고 이 지점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이라는 이미지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객관성이나 합리성이라는 것도 일종의 감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본다면, '과학자들의 몸에 새겨지는 객관성이라는 감각은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도 생겼고요. 또 동시에 제가 실험실에서 참여관찰을 해보면 과학자들이 서로 소통을 하면서 실험결과나 연구 대상을 몸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제가 있는 곳은 구조 분석을 많이 하는 곳이라서 뭐 분자가 접혔다, 펼쳐졌다, 이런 것을 계속 몸으로 표현하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자신의 연구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가나? 그리고 또 그 사이에 있는 매개자인 장비와는 또 어떤 관계를 맺어 가나? 이런 면에서 몸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구재령: 안녕하세요, 구재령입니다. 저는 몸에서도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이나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 같은 성 호르몬에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도파민 부족이나 도파민 중독, 이런 용어들을 많이 쓰고, 또 테스토스테론이 넘친다, 이런 표현도 자주 쓰잖아요? 그런데 그 물질들이 몸에서 실제로 하는 일이 뭘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인간의 행복이나 중독 같은 복잡한 상태가 하나의 물질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념이 너무 단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물질의 과잉이나 결핍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간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이런 방식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역사적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히포크라테스의 사체액설부터 이어지는 계보를 볼 수 있거든요. 어떤 특정한 체내 물질이 너무 많다, 너무 과잉이다, 아니면 너무 부족하다, 이런 식의 설명이 계속 유행하는데, 그 내용만 조금씩 달라지는, 아니면 물질만 조금씩 달라지는…. 그런 설명들이 계속되어 온 것 같고요. 이런 식의 환원주의적인 접근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그리고 당사자들의 자기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해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희수: 안녕하세요, 조희수입니다. 저는 제가 과학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쯤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겼는데요.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이슈가 되었던 페미니즘 문제들이 몸과 많이 맞닿아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제 연구 주제나 관심사에서도 몸을 빼놓을 수 없게 된 것 같아요. 디지털 성폭력이나 탈코르셋 담론도 그렇고, 제가 제일 처음 관심을 가졌던 일회용 생리대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슈도 있었고, 또 제 석사 논문과 연결되는 재생산 기술, 재생산 권리 등이 최근에 이슈가 됐던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계속 이런 의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보니 과학기술이 여성의 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석사학위 논문도 초음파 진단기가 한국 산부인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그게 여성들의 임신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주제를 다루게 됐어요. 페미니즘 논의들을 검토하다 보면 초기 페미니즘 논의들은 과학기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 논의들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는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과학기술을 계속 활용하고, 과학기술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과학기술과 관계맺기를 아예 거부하기보다는 이것과 어떻게 새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구자로서 이런 담론들에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 과학기술과 여성의 몸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과학학의 시선에서 몸을 다룬다는 것
최석현: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과학학이야말로 여러분의 문제의식을 관통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제일 좋은 지점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모두 몸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인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학이라는 분과에 속해 있기도 하잖아요. 전통적인 학제 구분으로 따지자면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을 하는 분이 모두 여기 자리해 주셨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과학학과에서 과학학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과학학에서 몸을 다루는 방식이 여러 다른 분과에서 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민병웅: 조금 막연한 이야기이기는 한데요. 저는 과학학에서 몸을 이해하는 데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과학학에는 과학에 관한 논의들을 좀 더 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는 자세라던지, 또 실제로 그와 관련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만났던 다른 분과의 연구자들은 과학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그게 주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의학적인 논의나 신경과학적인 논의, 그런 것들에 대한 설명들을 그대로 둔 상태로 그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 다른 논의들을 관심을 갖고 분석을 한다거나, 담론 같은 얘기들을 할 때도 예전보다는 많이 행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과학에 관한 담론에 대한 분석까지 들어가는 느낌은 좀 덜 받는 것 같아요. 두 번째는 기본적으로 과학학이 추구해 온 방향성이라고 생각하는데, 과학학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해 논의한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죠. 그런데 적어도 한국 학계에서는 비인간 행위성에 대한 연구가 21세기 들어 주목 받기 시작하는 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몸이라고 하는 게 사실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여러 미생물이나 테크놀로지와 관계를 맺으면서 계속 바뀌어 가고, 정의되고, 뭐 개선되기도 하고, 또 나빠지기도 하는 그런 면들이 있는데, 과학학이 그런 것들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최석현: 네, 서로 다른 두 가지 차원의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원래 우리 분야 자체가 몸을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분과는 아니죠. 그런데도 옛날부터 이런 이야기가 많이 있었던 분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하나는 과학학의 내부 논리를 따를 때, 우리가 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과학학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에 대해 질문해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다른 하나는, 과학학이 몸 연구에 있어 기존에 없던 어떤 제안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수 있겠습니다.
김연화: 제가 느끼기에는 몸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대상으로서 많이 다뤄져 왔고, 그래서 ‘몸’ 혹은 ‘몸 연구’라고 했을 때, 과학에서는 연구 대상이나 의료에서는 환자의 몸, 이런 쪽으로 많이 다뤄져 온 것 같아요. 과학학은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보니, 과학학이 과학이나 의료를 탐구하면서 환자를 대상으로 어떤 지식이 만들어지는지, 또 지식이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어온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것의 반대까지는 아니라 해도 지식을 만들어 내는 과학자의 몸에 오히려 관심이 있거든요. 과학자들이 다른 연구 대상을 다루면서 자신의 몸과는 어떤 관계 맺기를 하고 있는지. 여기에서 이제 제가 잘 못 하는 (웃음) 대상과 주체, 뭐 이런 얘기들로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그 이분법을 깨려는 연구도 많았지만…. 아무튼 대상으로서의 몸보다는 지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몸을 한 번 보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실험실 민족지와 STS 논문에서도 과학자들이 자기 몸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어떻게 과학자의 몸에 체현되는지에 대해 잘 된 연구가 많이 나오고 있기는 해요. 그래서 저는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또 장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돌봄이라는 측면에서, 돌보는 몸이라는 측면으로 과학자를 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과학학 내에서는 내 연구가 이런 의의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반면, 이건 제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인접 학문분과에서는 주체로서의 몸에 대한 논의에서 인간 외의 사물이나 비인간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소외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요. 최근에 비인간 논의가 많이 나오고 있는 만큼 비인간들을 인간과 대등하게 관계 맺는 행위자로 둘 때, 사람의 몸이 어떻게 다시 구성되는지 이런 측면에서 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최석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요. 과학학 이외의 분과에서 인간 아닌 것을 다룰 때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는데, 연화 선생님이 보시기에 보통 다른 분과에서는 몸을 인간으로 다루는 것 같나요? 아니면 비인간으로 다루는 것 같나요?
김연화: 되게 어려운 것 같은데요. (웃음) 인간의 몸과 다른 개체들을 다르게 보는 것 같아서요. 특히 인류학자인 데스콜라(Philippe Descola)가 서구와 비서구 사람들에게서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 이렇게 구분을 해서 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몸은 인간의 세계에 있는 문명화된 몸으로 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 문명화되지 않은 무언가로 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그런데 그걸 인간과 동일한 영혼을 지니느냐, 아니면 동일한 몸을 지니느냐, 이런 식으로 나누다보니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연을 계속해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거든요. 물론 데스콜라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동물들의 세계를 다른 부족세계라 부르기도 하면서 인간이 상위에 있고 비인간들을 하위에 두는 기존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나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에서 과학학이 조금 더 자유롭지 않나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보는지? 그건 제가 잘 모르겠어요.
민병웅: 이 주제에 대해 드는 생각은 인문·사회과학자가 몸을 다룰 때 그것을 인간으로 다룬다는 말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몸에 관한 담론분석이라든지 몸의 물질성이나 육체성을 얘기를 하면서 연구를 할 때조차도, 심지어 의사들이나 과학자들조차도, 과학학이나 의료사회학이나 이런 사람들이 비판을 할 때, 몸 자체를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 몸을 데이터화 시켜서 바라본다는 게 푸코 이래로 계속 비판을 해온 지점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과학학 연구자가 개인의 경험이나 몸에 대한 감각 경험 이런 것들을 재현하면서 몸에 대한 대상화를 의식하고 다루려 한다 해도, 육체성을 다루는 연구자들이나 담론의 재현을 보는 연구자들이 여전히 이 몸 자체는 계속 대상으로, 분석의 대상으로 놓는 경향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면 이 몸을 인간으로 다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결국에는 그 몸을 감각하는 당사자들의 발화, 생각, 뭐 이런 것들을 최대한 생생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구가 이뤄져야 할 텐데, 그렇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 발언에 대한 분석이 또 들어가게 되고, 그 순간만큼은 몸은 여전히 계속 비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거든요. 일단은 되게 추상적인 얘기 같기는 한데, 뭐 꼭 몸을 대상으로 다룬다고 해서 그것이 규범적으로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건 또 다른 지점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다루는지가 훨씬 중요하니까요.
구재령: 다른 분과에서 몸을 대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물학적인 몸은 차치하고, 우리는 그 몸에 대한 언어적인 의미의 생산을 보겠다, 이런 접근 방식이 좀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생물학적인 몸에 대한 발언권은 생물학자들에게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둘러싼 의미의 구성을 보도록 하겠다, 이런 식으로 분리를 하는 경향이 있는거죠. 사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많은 분야들이 굉장히 성장할 수 있었잖아요? 예를 들어 페미니즘 같은 경우에도 섹스와 젠더를 분리함으로써, 그리고 페미니즘은 섹스가 아니라 젠더를 다루는 분야라고 주장함으로써 독자적인 분야로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조금 발목이 잡힌 게 있잖아요. 왜냐하면 결국에는 생물학적인 몸에 대해 발언할 권리를 스스로 차단한 거니까요. 그에 반해 과학학에서는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요즘은 페미니즘이나 인류학 이런 곳에서도 물질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죠. 그래도 과학학이 그런 이분법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선두 학문 중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은 듭니다.
최석현: 네, 저도 그런 느낌이 있고요. 말씀하신 걸 정리해 보면, 재령 선생님이 말씀한 것처럼 페미니즘 담론에서 섹스와 젠더의 구별도 그렇고, 의료사회학이나 의료인류학에서 질병(disease)과 병(illness)을 구별할 때도 비슷한 구도가 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20세기 중반에 사회학, 인류학, 페미니즘, 여러 분야에서 다 이런 전략을 썼던 것 같아요. 당시의 지성사적인 배경을 본다면, 인문·사회 분과들이 당시 행동주의와 계량화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채택한 인식론적 전제가 대부분 현상학에서 왔거든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나 후설(Edmund Husserl) 같은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몸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얘기해놨던 것들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현상학적 방법론을 채택함으로써 우리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몸을 볼 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풍부한 경험을 참고할 수 있게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학은 결국 의식에 주어진 체험에 관한 학문이고, 현상학적으로 본다는 것은 곧 몸에 대한 모든 연구가 그 몸을 독점적으로 체험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특정한 의식이 그 몸과 관련해 체험한 바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거거든요. 결국 생물학의 연구 방법론이 몸과 직접 대화하려 하는 거라면, 현상학은 몸은 직접 말할 수가 없으니 그 몸에 대해 체험한 사람의 의식이 하는 말을 듣자고 하는 건데…. 그러면 현상학적 방법론은 결국 몸에 대해 내가 느낀 아픔, 내가 느낀 정체성,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물론 20세기 중반에 인문·사회과학에서 이런 전략을 채택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 전까지 인문·사회과학은 텍스트를 다루는 학문이고, 담론을 다루는 학문이고, 언어를 다루는 학문이지,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룰 방법론이 없는 상태에서 현상학적 우회로를 선택한 것은 저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그렇게 하고 나니 봉착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 결국 재령 선생님이 말씀을 한 것처럼 젠더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생물학에 넘겨 버리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 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질병에 대한 이야기는 의학에 넘겨 버리고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런 문제들이 생겨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관념과 물질의 이분법을 해체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전략을 잘 제공해 주는 분야가 결국에는 과학학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분야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물질로서의 몸을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몸을 소유했다고 여겨지는 심신복합체의 ‘심’ 부분에서 나온 얘기를 똑같이 하지 않고도 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느냐, 그것을 항상 고민해왔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고민이 과학학 바깥에서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과학학의 그간의 누적된 연구 성과가 반영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과학에 대해 몸이 말해주는 것
최석현: 그러면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 정리하고요. 만약에 그렇다면, 몸에 대한 여러 이야기에 과학학이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러면 과학학 자체에는 몸 담론의 이런 이야기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민병웅: 제가 한 얘기는 아니지만, 연화 선생님 작업의 문제의식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몸과 합리성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합리성이라는 것 자체가 단순히 지식이나 어떤 인식론의 논리적인 흐름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비인간의 몸이라든지 아니면 몸을 쓰는 행위 자체가 합리성을 구축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객관성이나 지식에 대해 전반적으로 논의하는 과학학 논의에 대해 조금 다른 시선에서 이 주제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 비슷한 맥락에서 그런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가령 기술에 대해,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해 다룰 때에도, 제품이나 기술, 또 특정한 인공물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생산자의 의도도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피드백에서 그것들이 계속 개선되고 변형을 이뤄 나가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인공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몸의 특징들이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 인공물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추적할 때 몸이 어떤 변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연화: 저는 다른 한편으로, 최근에 유행하는 개념을 쓰자면 의외로 과학학에서 정동(affect)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안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과학학이 지식에 대해 다루다 보니까, 감정, 감각, 정서의 영역을 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에 넘겨 두고 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정동이 일종의 몸의 작용이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몸과 몸이 만나서 어떤 분위기를 이끌어 내고, 뭔가 몸에 반응이 일어나는 그런 작용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과학학에서 정동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사실 라투르(Bruno Latour)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같은 분들이 정동이라는 말을 내세우지는 않아도 이런 작업들을 계속 해왔기도 해서, 한편으로는 과학학이 오히려 정동에 대한 관점을 더 많이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이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아 왔는데, 조금 더 우리가 드러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과학학이 앞에서 병웅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글로, 텍스트로 나타나는 인식론적인 무언가를 넘어서서, 과학이 어떤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지, 또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정동을 이끌어 나가는지, 이런 것들까지 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민병웅: 제가 과학사 전공자다 보니까…. 과학사 뿐만 아니라 역사를 하는 사람들이 고민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예전에는 가령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한다거나 어떤 발화나 표현을 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경제적인 구조적인 맥락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일반적으로 행동하는지에 대해 다뤄왔는데요. 이제는 반대로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의 몸, 그 자체가 시사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두 가지 예시가 떠오르는데요. 하나는 소위 후성 유전학을 활용해서 반인종주의 운동을 하려는 흐름들이 최근 있어왔던 것으로 아는데요. 노예 제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누적되어 온 것들이 신체에 새겨지고, 그래서 지금 세대에 와서 몸에 여러 문제가 생기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인종주의의 역사에 대한 논의를 생물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까지 나아가는 흐름이 있고요. 물론 가령 흑인 운동가들이 어머니 신체에 대한, 또 다른 몸에 대한 차별적인 경험들을 재생산하는 면이 있기도 하고, 또 피해자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새겨진 피해에 대해 인정을 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신체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것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갈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어쨌든 그런 몸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세상을 사고하는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다른 예시는 이제 몸 자체가 역사적 사건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가령 위안부 피해라든지 성폭력의 피해나 집단 폭력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경험이 신체에 남아 있는데, 몸에 관한 경험, 육체적 경험을 통해 기록으로 전부 해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폭력적 사건이나 역사는 당대 혹은 후대에 은폐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을 텐데, 어떻게 보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증거들을 찾아내는 방식, 어떤 폭력에 대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거나 기록을 왜곡시켰던 것에 대해, 그렇게 역사적으로 가려져 있고 공식화되지 않은 논의들을 공식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증거로서 신체 자체가 활용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법정에서도 뭐…. 그런 문제들은 사실 조금 거리가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 가려져 있는 이야기들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또 몸에 대한 이야기의 장점 아닌가 생각해요.
조희수: 방금 이야기해주신 것들과 연결되는데요. 사실 과학학 연구자가 과학기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굉장히 거시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되게 미시적으로 갈 수도 있고. 거대 기술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 몸에 맞닿는, 우리 주변에 있는 기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과학학 연구자가 몸을 다루게 되면 과학기술에 대한 논의를 굉장히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층위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보통 의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까…. 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복잡한 의학 지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이런 지식들이 몸에 왔을 때, 직접 적용이 됐을 때, 나한테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또 이게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면, 조금 더 잘 와닿는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구재령: 저도 비슷한 이야기인데요. 앞에서 연화 선생님이 말씀했듯 과학학은 관찰하는 행위, 지식 생산 행위라는 것이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런 행위가 아니라 특정한 위치, 특정한 몸을 통해 하는 행위라는 것을 보여줬잖아요? 상황 속의 지식(situated knowledges)이라는 말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몸을 갖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갖는 객관성의 개념, 그리고 우리가 생산하는 지식도 달라진다는 것이죠. 최근에 생태학이나 의학 같은 분야들이 보여준 게, 모든 몸이 같은 몸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운동을 배웠고, 어떤 일을 했고, 이런 것에 따라 몸이 각각 다 달라진다는 것이잖아요. 예를 들어 환경 오염에 노출되면 몸이 상할 수밖에 없고…. 다음으로, 인간의 몸에 100조 개가 넘는 미생물이 공생하고 있고 또 생존을 위해 그래야만 하는데요. 이런 식으로 사실 인간의 몸을 단일한 개체보다는 수많은 몸의 중첩으로도 볼 수 있거든요. 다른 분야들이 이런 것들을 잘 보여준 것 같아요. 그렇다면 과학학이 여기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뭐냐? 우리가 몸을 통해 지식을 생산한다고 말할 때의 그 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그래서 상황 속의 지식이라는 개념도 우리가 더 풍부하게 논의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최석현: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한편으로는 여러분의 연구에 어떤 의의가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류 과학학이 아직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굳이 이 주제에 대해 첨언한다면, 옛날에 라투르가 “How to Talk about the Body?”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제임스(William James)와 데프레(Vincianne Despret)를 인용하면서 했던 이야기인데…. 몸을 갖는다는 것은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그러니까 몸을 갖는다는 것은 곧 누군가에게 받은 영향을 내 몸의 어떤 물질성으로서 기억하기도 하고, 또 다른 존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능력을 갖기도 하는, 그런 일이라는 거죠. 그런데 정의상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아까 연화 선생님이 말씀한 정동과 거의 같거든요. 제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이 논문을 읽었지만 이런 정동 같은 개념의 함의라든지, 아니면 병웅 선생님이 인종주의를 언급하면서 말씀한 우리 몸에 새겨진 역사성의 흔적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과학학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음에도 아직까지 과학학 내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주로 기술을 논하는 사람이지만, 저는 이런 이야기가 기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술의 흔적들이 어떻게 몸에 새겨지는지, 다른 한편으로 저는 기계들도 몸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 인공지능 담론이 너무 추상화돼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로봇들이 갖는 하드웨어적인 측면들…. 아무튼 이 이야기를 굳이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오늘 대담의 목표인 만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몸 연구의 어려움과 경험의 문제
최석현: 여러분의 이야기는 이제 정리가 잘 된 것 같고요. 다음 주제로 넘어가면…. 여러분이 각자의 연구를 해나감에 있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리고 또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특히 여러분의 정체성, 몸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학 연구자라는 정체성과 관련해서 어떤 난관이 생기는지, 혹은 어떤 난관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민병웅: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는 몸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육체성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는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요. 몸에 관한 담론을 재현하는 방식은 이미 저보다 훨씬 잘 할 수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이 해오기도 했고, 몸에 관한 논의에 새로운 영감을 주기에는 방법론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에 대해 아직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특히 한국 사례에서 사료로부터 다양한 개인들의 감각 경험을 읽어내는 방식에 대해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운 것 같고요. 지금 저는 엘리트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와 그 여성들이 자기의 몸에 대해 느끼는 감각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방식 정도로 접근하는 데서 그치고 있는데…. 특히나 후자의 경험에 다가가는 데는 한계가 많고 이게 두 번째 문제랑 연결이 되는데요. 저는 화장품 산업의 역사, 특히 화장품의 사용에 관한 역사를 보고 있는데요. 제가 보는 대상들이 생산자가 됐건 사용자가 됐건 여성 행위자들이 많아요. 그러다 보면 남성 연구자로서 느껴야 되는 성찰성의 문제를 항상 고민하면서 연구해야 하는 것 같아서…. 특히 여성의 신체가 재현되는 방식이라던지 이런 논의에 대해 들어가다 보면 여기에서 느껴지는 성차에 관한 얘기라던지, 섹슈얼리티의 문제라던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분석하고 지적하는 게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데, 제가 이성애자 남성 연구자로서 개인적으로 그런 사례들을 바라보면서 이것들을 어떻게 굴절시켜 봐야 하는지, 이런 문제들이 고민이 되는데…. 그래서 사실 고민이 된다는 것은 방법을 아직 모르겠다는 거고…. 네, 그래서 현재는 이런 점에서 난관이 있습니다.
조희수: 저도 사료를 갖고 보는 역사학 연구자이다 보니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 같아서 뒤이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겠지만 한국에서 몸이 논의되는 특정한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것들이 사료로 남아야 우리가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료를 갖고 연구를 할 때 내가 보게 되는 몸들이 획일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의사가 남긴 것도 그렇고, 환자가 남긴 것도 그렇고…. 환자가 남긴 기록이라고 해서 나의 몸을 대상화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몸을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이 있기 때문에 사료들이 어떤 경향성을 갖게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연구자로서 그걸 갖고 다양한 논의를 해보고 싶으면서도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한계들이 있거든요. 저는 일단 재생산 기술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니까 재생산 기술을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해 논의할 때 굉장히 조심스럽게 되고, 또 내가 이 논의를 하면서 누군가를 배제하지는 않는지,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근데 또 내가 경험했다고 해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거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아까 제가 석사논문에서 산전 초음파 기술을 다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제가 임신한 경험이 없는 여성으로서 임신한 여성과 초음파 기술의 경험에 대해 다룬 것인데, 연구자로서 당사자의 경험을 함부로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그래서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렇지만 내가 임신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직은 저도 병웅 선생님과 똑같이 해결하지 못한 상태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저는 제가 다룰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 논의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 정도에 그치더라도, 그것이 연구자로서 해야 하는 책임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냥 어떤 지점에서 멈춘다…. 이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석현: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해지는 게 있는데요. 병웅 선생님과 희수 선생님은 이런 쟁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잖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논문을 쓰고 또 출판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면 어떤 식으로든 그걸 봉합을 시킬 텐데, 지금은 어떻게들 하고 계신가요?
민병웅: 아직은 제가 과정생이잖아요?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일단은 최대한 젠더에 관해 이뤄진 논의들을 어떻게든 찾아서 보려 하고, 이론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그런데 그런 걸 하면서도 아직은 좀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보통 젠더 연구는 여성들이 차별 받는 입장에서 그들의 상황 속에서 고민을 하고, 문제들을 지적하고,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담론을 해체해 나가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갔고…. 이런 연구자들이 20세기 이후 제도화되는 남성의 몸을 새로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남성도 계급이나 인종에 따라 젠더 경험이 다르다는 것에 착안해서 나아가려 하지만…. 또 그것은 남성의 몸에 대한 이야기고, 여성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러니까 남성 연구자가 다른 젠더를 바라봤을 때에 관해서는 저에게 이론적인 영감을 주는 논의는 잘 없는 것 같거든요. 일단은 이런 난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료를 얻는 문제에서도 제가 방문 판매원이나 당시 화장품을 개발했거나 미용 연구를 했던 여성, 이런 행위자들을 인터뷰한다 했을 때, 분명 특정 주제를 연구하는 여성 연구자와 인터뷰하는 것과 제가 인터뷰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것이고, 대담자가 말하는 방향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분명 차이가 생길 텐데요. 이런 부분들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더 필요하고 경험으로 더욱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몸 역사학, 몸 민족지, 몸 과학학
김연화: 아마 사료를 읽는 분들도 연구자의 몸으로 읽어내시는 걸 텐데, 저는 현장 연구를 하다 보면 어려운 점이 현장을 보고 듣고 감각하는 내 몸의 존재더라고요. 지금 저희가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게, 각자가 다른 경험을 가졌고, 그 경험들이 특정한 몸을 만들어 낸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그런 몸인데…. 그 몸이 지금 다른 몸들을 읽어낸다는 게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제가 사료를 읽는 분들보다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한 가지 출구를 더 가졌다고 할 수 있다면, 민족지라는 연구 글쓰기의 방법으로 감각하는 나에 대해 쓸 수 있다는 점이예요. 민족지에서는 민족지를 쓰는 사람의 위치성을 이야기 하면서, 현장에 들어가서 본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기반으로 연구하라는 이야기가 되게 많다보니, 연구자로서 현장을 경험하는 나를 더 민감하게 느끼고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역사 연구를 하는 분들보다는 조금 쉬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하나 들었고요. 몸 연구 혹은 몸 논의에서 또 다른 어려운 점은 논의가 너무 많다는 거, 일단 다 읽기가 어렵고요.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몸이라는 개념을 연구마다 혹은 분과마다 다르게 사용한다는 점이예요. 몸이라고 할 때, 병웅 선생님은 계속 인종으로서의 몸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고, 젠더와 성별이 갖는 층위들도 몸에 쌓여 있고, 과학에서 이야기할 때는 몸은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반응을 하는 그런 몸이잖아요? 그런 층위도 있고. 되게 많은 부분들이 섞여 있는 것 같아서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를 해 가면서, 어느 정도 걸러내면서, 혹은 연결을 시키면서, 내 연구 목적에 맞게 올바르게 연결시켜야 할까…. 마지막으로 제가 가진 또 하나의 어려움은 제가 현장에서 계속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한정적이고, 그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개별적인 개체인 거잖아요? 사실 저는 개체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과학자라고 하면 되게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것도 있고요. 조금 예전 얘기지만 트래윅(Sharon Traweek)의 책을 보면 어떻게 물리학자가 되어 가는지를 학부생,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 이런 식으로 단계별로 분류해서 보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서도 사실 경험이 다른 몸들이 섞여 있는데 그 개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혹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이게 어려운 것 같아요. 이게 맞는 예가 될 지 모르겠지만, 제 차량 같은 차종이더라도 다른 사람의 차를 운전해보면 느낌이 되게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공장에서 찍어낸 기계조차 누가 길들였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그러면 인간에 대해서도 이런 개체성들을 간과하고 똑같이 얘기하면 그게 맞나? 그러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걸 묶을 수 있을까? 이걸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최석현: 지금 제가 흥미롭게 느끼는 점은 비슷한 주제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 사이에서도 방법론적 차이에서 오는 특징들이 있는 거잖아요? 연화 선생님은 인류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시기에 오는 장단점이 있고, 병웅 선생님과 희수 선생님은 역사학적 방법론을 쓰기 때문에 오는 그런 특징들 말이예요. 그런데 여기에 모종의 딜레마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연화 선생님이 처음에 말씀하실 때는 구체적인 몸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고, 또 구체적인 몸을 갖춘 전문가로서 말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죠. 실제로 그렇죠. 반면 역사학자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말하는 사람을 자처해야 하죠. 설령 역사학이 객관적이어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공격하고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역사학의 기본 설정이라는 것을 알고 가는 건데요. 반대로 인류학 텍스트는 학술서에서도 내가 왜 이 연구를 시작했고, 이 연구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고, 내가 어떻게 변화했고,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를 하죠. 그리고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직접 하는 것이 학문적인 엄정함이고 미덕이 되는 거고요. 이 차이를 생각해 보면, 연화 선생님이 말씀한 것처럼 자유롭다는 느낌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큰 속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몸에 매여 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매여 있고…. 그러면 오히려 역사학자는 단순히 객관성을 자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어쨌든 조금 더 보편적인 것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죠. 결국 민족지 쓰는 사람과 역사가는 처한 상황이 다르다…. 그게 몸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내가 내 몸을 갖고 다른 사람들의 몸과 공명할 수 있는 조건에서 연구했을 때 더 잘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이 사람들의 몸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기록들을 통해 여러 맥락들을 고려하면서 이야기할 때 더 잘 보이는 것도 따로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구재령: 첨언하자면, 민족지학자와 역사학자가 공통적으로 겪는 난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앞에서도 나온 이야기인데, 몸에 대한 자료를 당사자들의 기록 또는 인터뷰를 통한 발화에 의존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희수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말하는 내용은 그때그때 접근 가능한 지식과 문화에 영향을 받잖아요. 또 모든 환경적인 조건이나 신체적인 경험이 의식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우리의 감정조차 때때로 억압되기 때문에 다 의식에 포착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그 한계를 극복하면서 몸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은 과학의 자원들을 끌고 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생물학이나 의학 같은 데서 생산한 문건들을 과학학의 자원으로 충분히 전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하면 받을 수 있는 비판 중 하나가, 결국 다시금 과학의 권위에 의존하는 게 아닌가? 이런 거예요. 그런데 그것에 재반박을 하자면, 어느 과학적인 자료를 놓고 꼭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양자택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 약학에서는 특정한 약물을 가지고 의도하는 치료 목적이 있으니까 약의 효과와 부작용을 구분하는데,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약이 갖는 효과도 약의 작용이고, 부작용도 약의 작용이잖아요. 그래서 같은 자료를 보더라도 과학자와 과학학자가 꼭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과학의 문헌들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빌려 와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더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최석현: 네, 자연과학의 이야기들을 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재령 선생님이 말씀한 것처럼 과학의 권위에 기대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이나 인식론적인 종류의 비판이 제기될 수 있겠죠. 이제껏 과학 지식은 상대적인 것이고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왔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적용해서 또 뭔가를 이야기할 수가 있느냐 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는 과학학의 귀중한 방법론적 자원 중 하나가 다름 아닌 과학 지식을 보편적인 도구로서 어떤 사안에 단순히 적용하기보다는 과학자의 시선이 아닌 시선에서 과학 텍스트를 활용하고 과학 지식을 이야기할 줄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과학 문헌에서 어떤 데이터를 뽑아낸다든지, 아니면 부작용이나 오류로 여겨지는 것에서 무언가를 읽어낸다든지…. 그리고 결국 이런 것이 쿤(Thomas Kuhn)을 비롯한 과학학의 창시자들이 했던 일이기도 하죠. 과학 텍스트를 과학자들이 읽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읽기.
한국에서 몸을 연구한다는 것
최석현: 이제 몸 연구를 하면서 부딪히는 난관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본인의 인종적·젠더적 위치 이야기도 나왔고, 방법론적인 이야기도 나왔고…. 이런 것과 관련해서 여러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성 또는 위치성과 관련해 굉장히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여러분이 한국에서 이런 연구를 한다는 사실이지 않을까 싶어요.
구재령: 저는 정신병에 관심이 있는데요. 적어도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아니, 사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한국 사회는 전문가주의가 강한 것 같습니다. 전문가의 말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거기에 딴지를 걸면 다소 무식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아울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위계가 입결에 따라 정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를 들면 양의사가 한의사를 무시하고, 정신과 전문의는 임상심리학자를 무시하고…. 예를 들어 서양권에서는 ADHD 같은 질환이 진짜 병인지에 대해서 의학 전문가와 사회학자 사이에서 활발한 논쟁이 이뤄지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그런 토론을 찾아보기가 힘들거든요. 전문가의 말에 토를 달거나,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데 정신과를 찾지 않거나 약물 치료를 거부하면 비합리적이거나 뒤떨어지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마찬가지로 몸에 관해 발언할 권리도 불균등하게 부여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다른 분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최석현: 전문가주의와의 대결은 사실 과학학이 옛날부터 다뤄온 뿌리 깊은 핵심 주제 중 하나죠. 사실 저는 정말로 의사가 수능 점수가 높아서 의사의 말에 더 권위가 실리는지, 한국 사회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하는 건 정말 납작한 건데….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데요. 어쨌든 전문가주의와의 대결은 콜린스(Harry Collins)라던지 한국에도 많이 소개된 과학학 주제이기도 하죠.
민병웅: 예전에는 화장하는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국에서 하얀색 피부를 좋아하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주의라는 시선에서 봤는데, 이제는 그렇게 보지 않으려 하는 연구자들이 나온지가 꽤 됐어요.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탈식민 상황 속에서, 혹은 식민지에서, 한국인들이나 조선인들이 피부 관리를 추구할 때, 이들은 백인의 흰 피부와는 다른 방향의 피부 상태를 지향하고, 그런 것들을 실천하기 위한 실험들을 계속해 나갔고, 이런 것들이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백이라고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든 이렇게 서구중심주의 서사와 거리를 두면서도 단순하게 서구와 반대되는 혹은 한국 특유의 무언가를 통해 설명하려는 서술을 벗어나야 하겠고요. 또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저는 이런 한국식 미백의 실천들이 다시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면들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위치성에 대해 정교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한국에서 많이 하는 방식의 실천들이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표상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지역에 사는 몸들에 관여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거든요. 물론 이를 단순하게 제국주의적인 함의가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또 한국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 사이에 또 위계를 설정하는 설명이 되는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설명을 학계에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연화: 저는 한국에 있는 연구자로서 힘들다고 해야 할까요? 미국인으로 미국에 살면서 미국에서 연구를 했으면 쉬웠을텐데, 한국인이라 어렵다 싶은 부분이, 청중이 둘이라는 거예요. 제 주제를 한국의 독특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과학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그에 대한 부담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할 때는 그냥 ‘과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연구를 한다’ 이렇게 보여줄 수가 있는데, 해외에 가서 말하면 “한국이라서 그런 특이한 게 나타난 거 아니야?” “과학 일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이라서 그런 것 같은데?” 미국이나 유럽을 가면 백인들은 자꾸 “한국이라서 그렇다, 너는 그걸 더 분석해야지.” 그런데 미국인들이 쓴 것들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과학은 이래” 하는데, 인도나 다른 나라 학자들의 작업을 보면 “인도는 이런 특성이 있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걸 보면…. 아, 되게 어렵다. 이게 여전히 식민주의, 혹은 포스트식민주의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최석현: 한국에서 서양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저도 그런 것들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서양에 가서 이야기를 해 보면, 한국인 연구자로서 한국에 대해 할 수 있는 되게 특이한 이야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싸움터에 나가야 하는…. 자원을 하나 포기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공감이 많이 됩니다.
과학학과 인접 분야들
최석현: 이제 한국 학계 내부로 논의를 한정해 볼까요? 여러분은 어쨌든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서울대에서, 과학학과에서 과학학을 공부하고 있죠. 다른 한편으로는 몸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인류학·사회학·역사학 등을 하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있고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런 상황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가요? 이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들을 하고 계신가요?
민병웅: 중요한 질문 같습니다. 저도 항상 고민하는 문제인데요. 저는 청중을 넓히는 것이 과학학 연구자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과학학 내부에도 다양한 전공이 있지만, 저는 과학학 연구가 과학학 외부의 연구자들에게 읽히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아까 과학학의 이론적인 기여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어떻게 보면 인간과 비인간을 함께 보는 최근의 트렌드를 과학학이 선도해 온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학 연구자들이 받아들여지는지의 여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이론을 만든 라투르나 해러웨이 같은 사람들이 대단한 거지 그런 걸 저희가 똑같이 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런 이론가들의 작업을 저희가 다른 분야 연구자들에 비해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내 연구를 읽어야 하느냐? 그걸 정당화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더욱더 몸 연구라는 하나의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통해서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학학 연구자들이 학계에서 네트워킹을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요. 사실 한국에서 몸에 대해 다루는 연구가 굉장히 많이 축적이 되어 있는데, ‘이 논문의 주제는 몸이야’라고 말하면 조금 애매한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분명 몸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몸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내 연구는 몸 연구야’라고 명시적으로 표방하는 연구는…. 잘 리뷰가 되어 있는 느낌도 아니고…. 각 분야 연구자들이 그냥 자기 관심사에 맞춰서 적당한 방법론을 쓰면서 연구를 하고 있는 실정? 그런 논의들을 모아서 학계 내에서 조금 더 체계적인 논의로 이끌어 나갈 때인데, 만약 인간과 비인간을 같이 보는 관점이 정말 중요하다면, 그런 것들을 과학학이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실용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조희수: 아까 병웅 선생님이 말씀한 것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은데요. 우리가 아주 전통적인 학제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걸 더 넓힐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겠죠? (웃음) 그래서 과학사를 연구하고, 과학사, 기술사, 의학사에 걸쳐 있는 연구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꼭 역사학자들이 하는 것만 할 필요도 없고, 과학기술에 묶여 있을 필요도 없고, 우리가 다 도전할 수 있고 기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그래서 진로를 다양하게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웃음)
김연화: 과학학이 한때는 과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학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특히 권력을 가진 지식으로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이 있었는데, 저는 이제 조금은 바뀌어야 하거나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요. 한국과학기술학회 학술대회 주제들을 보면, 과학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들이고, 이번에는 함께 지식 커먼즈를 만들어가는 인근 학문과의 협업을 다루는 주제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인근 학문이 다 인문·사회과학인 거예요. 그래서 왜 여전히 우리 과학학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는 친한 제스처를 취하는 걸까 하는 문제의식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해외의 과학학자들은 요즘은 과학과 굉장히 친화적인 것 같더라고요? 사실 라투르도 그 얘기를 하긴 했는데, “예전에 과학 전쟁 했을 때는 과학의 전사들이 자기를 죽일 듯 했는데, 어느 순간 기후변화 앞에서 도움을 청했다” 이러면서 이후로는 계속 생태학자나 이런 사람들이랑 협력 작업을 했단 말이예요. 또 많은 경우 과학사와 과학이 같이 가는 경우들도 있고요. 이를테면 교육을 같이 서로 받게 한다던가. 제가 알기로 하버드 같은 경우에도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과학사 부전공을, 제가 아는 분도 그렇게 했는데 화학 박사를 하면서 과학사 석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이 있었고요. 과학학 전공자들이 이제는 과학 연구의 기획 단계부터 같이 들어가서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렇죠. 저는 아무래도 과학자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다루다 보니 과학자와 협력을 하고 싶기는 해요. 졸업하고 나서도 그렇게 하면 너무 좋겠고요. 연구비도 많은 과학에 같이 가고 싶습니다. (웃음)
구재령: 비슷한 생각인데요. 독창적인 연구라는 게 아무도 안 하는 걸 다뤄서 특별한 게 아니라 같은 것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로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과학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당연히 과학자들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고,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좋은 과학학 연구는 이렇게 과학자들에게 사회과학에서 배울 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과학자들에게 과학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렇기에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회적인 논의를 할 때도 과학적인 자원들을 적절하게 섞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그러니까 말로만 과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허물자고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적 자원들을 적절히 섞고 재배치하고…. 이렇게 해서 설득력 있게 논의를 펼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요. 저도 그런 연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내 몸을 다시 느끼는 경험
최석현: 네, 좋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도 이쯤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대담을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민병웅: 아까 나의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난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저는 화장품 산업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전공을 떠나서 남성 연구자들도 독자로 생각을 하면서 이걸 어떻게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거든요. 왜냐면 나와 다른 몸에 대해, 사람들이 나와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다 보면 자신의 몸에 대한 메타적인 사고를 할 계기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피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매일 면도나 스킨케어나 이런 것들을 하면서도 내가 그런 것들을 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진 적이 없어요. 그냥 당연히 하는 것으로만 느껴왔는데…. 여성들이 화장을 하고, 화장을 위해 고민을 하고, 그런 과정들을 보게 되면서, 내가 이런 것들을 관리하는 것의 의미, 그러니까 내 피부를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도 메타적으로 보게 되는 게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내 경험에 대해 되돌아볼 계기가 된 것 같은데, 그렇게 하다 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실천에 붙어 있는 다양한 규범이라든지 정당성의 문제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내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것들을 뒤집어 보거나 다른 실천으로 바꿔보고, 그러면서 내 몸을 더 잘 조절하게 되는 경험으로 나아가기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연구를 하고 글을 썼을 때, 그것들을 읽는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다양한 몸들이 우리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조희수: 저도 병웅 선생님의 이야기에 덧붙여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까 제가 한 이야기를 마무리를 덜 한 것 같아서요. 내가 아닌 몸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고, 내가 하지 않은 경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그냥 이야기하지 않기를 택해야 하는지 되게 많은 고민이 있는데요. 구체적인 사례를 갖고 이야기를 하면…. 나는 출산하지 않은 몸이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법도 찾아야 하고요. 또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은 몸이라고 해서 이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에 관한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이들이나 그 문제를 겪고 있는 여성들이 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위치성을 갖고 이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이 사람들의 문제를 내 문제와 연결지어서 같이 해결할 방법을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병웅 선생님이 화장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자신이 일상적으로 하는 면도나 스킨케어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저도 비슷해요. 말씀 드린 것처럼 저는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의 몸 담론에서 출발하여 몸과 관련된 과학학 연구를 시작했는데, 과학학 연구를 하면서 또 다시 제 몸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성찰해보게 되더라고요.처음에는 임신한 몸을 들여다보고 측정하는 기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많은 여성들의 경험을 듣고 저 또한 간접적으로 비슷한 기술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의학 기술이 갖고 있는 위계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고요. 다만 과학학 연구자로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본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지식을 활용해 실제로 몸과 기술의 관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보게 된다는 거예요. 아직은 제가 그렇게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저희가 하고 있는 논의를 통해 몸과 기술이 맺는 관계의 역동성을 이야기하고 다른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실제로 그 관계를 더 낫게 만드는 데에도 과학학이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재령: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까 나온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생물학적인 몸과 그것에 대한 담론 혹은 의미를 분리하는 것이 예전의 접근법이었다면, 요즘의 과학학은 담론과 물질 자체를 서로 불가분하게 얽힌 것으로 보잖아요. 그러면 예를 들어 우리가 생산하는 의미가 물질에도 침투를 한다고 해야 할까요? 물질 자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게 요즘의 논의인 것 같아요. 언어와 개념이 물리적 실재 자체를 특정하게 경계 짓거나, 또 특정하게 상연(enact)한다는 식으로, 이런 주제들도 과학학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하는 실천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 그 자체가 몸 자체를 만들고 있다는 거죠. 물질성이라는 것이 언어로부터 괴리된 것이 아니라 사실 물질 또한 의미를 따라 형체가 부여된다…. 그런 현상을 풍부하게 다룰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직 한국에서는 그런 연구를 많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가 ‘도파민 중독’ 같은데요. 저도 이 말을 자주 쓰거든요. 그런데 이런 말을 씀으로써 우리 몸을 둘러싼 실천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나아가 우리 몸 자체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이런 주제를 다루는 연구가 앞으로 나오면 재밌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석현: 선생님께서 직접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구재령: 네, 제가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르겠습니다.
최석현: 네, 그러면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몸 연구자가 아니지만 저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 대담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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