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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저널 제3호(2026.06.)

'사이'는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학생들이 만드는 학생저널입니다.  제3호 PDF 다운로드 특집: 감각과 상상 그림의 인지심리학과 관찰의 이론적재성 강규태 가속기 감각하기 : 현장연구자의 민족지 연구 방법론에 대하여 김연화 기술은 어떻게 우리를 늙게 하는가? : '기술적 노화'와 돌봄의 STS 심은섭 케플러의 『꿈』, 달에 관한 광학 이론과 상상 장신혜 서평 아주 사적인 과학의 네트워크 :  도널드 오피츠 외, 『근대과학 형성과 가내성』 박윤지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 : 김은성, 『감각과 사물: 한국 사회를 읽는 새로운 코드』 손하늘 과학을 돌보는 '느린 과학' : 이자벨 스탱게르스,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 안유진 대학원생 이모저모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 강정섭 낯선 캠퍼스에서 새로운 공부와 익숙해지기 오수환 헌 신입생의 수기 이준영 2025 APPSA TAIWAN 경험기 이형석 첫 학술 발표, 설레었던 데뷔 무대 : 2025 APPSA 참여 후기 정원호 '왜' 이후의 질문을 기다리며 : 과학학과 연극반 블랙박스 제1회 공연 <학술원 보고> 연출 후기 공일환 SF 단편 <미확인> 구본진 부록 학과 소식 편집 후기

신입생 적응 수기: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강정섭)

대학원생 이모저모: 신입생 적응 수기


함께 공부하는 일에 관하여: 나의 첫 학기에 대한 회고


강정섭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page1991@snu.ac.kr


리처드: (무에게, 허공에 대고) 비겁하도다! 내 삶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나는 이 노름판의 물주가 된 것이다……. 나는 오늘 땅 위에서 여섯 명의 리치먼드를 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그중에 다섯을 죽였는데도 여전히 한 놈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말을 가져와라! 말을! 내 왕국을 위해 말을!
끝?

- 카르멜로 베네, 「리처드 3세」의 마지막 장면[1] 

… 출구를 통해 나아간 세계는 고요하지 않다. 탈출이란 텅 빈 공중으로 떠올라 혼자되는 것이 아니라, 출구의 안팎을 감싸 안은 세계 속의 수많은 존재와, 새롭게 알게 될 혹은 이미 알고 있던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다시 그러나 다르게 뒤섞이는 일이다. 탈출하는 존재는 소란스러운 세계를 휘젓는 또 다른 소란스러움이 되어 세계와 함께, 세계를 향해 휘말린다.

- 강정섭, 연극 〈묵티〉 내부 세미나 발제문 中[2] 

다시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연극 비평을 쓰다가 참고하고 싶은 책이 있어서 도서관을 뒤졌는데, 구립 도서관에 책이 없었다. 도서 구매 신청을 하고 기다리기에는 한시가 급했다. 대학 도서관에 가야 했는데, 그즈음의 나는 학교라면 끔찍하게만 느껴져서 친구들을 만나고 카페에 앉아 공부하러 하루가 멀다고 학교 앞 대학가를 지나다니면서도 정작 학교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때로 정히 학교 도서관 소장 도서가 필요하면 아직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책을 빌려다 읽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는 그 친구들도 당장 책을 빌려다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내가 직접 가야 할 텐데, 학교 도서관에 간다는 것이 정말이지 영 내키지 않았다.

혹시 모르는 마음에 동문회원 신청을 해서 도서관 이용 자체는 가능한 것이 이 경우에는 오히려 문제였다. 도서관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학교 캠퍼스 쪽으로는 눈길도 주고 싶지 않은 내 마음 밖에는, 정말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계속해서 외면해 왔던 나의 한 부분을, 정말이지 피하고 싶었지만, 손 위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나에 대해서, 계속해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드러내 보이는, 계속 ‘학교’를 생각하게 되는 나의 한 부분에 대해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늘 내가 ‘공부하는 사람’이리라고 상상해 왔다. 단지 무언갈 더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누구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혹은 더 잘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그러기 위해선 첫째로 그 ‘당신들’이 모르는 걸 알고 있어야 했고, 둘째로 ‘당신들’이 모르는 걸 내가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들’에 대해 알아야 했다.

그래서 어렸을 나는 과학 연구자가 되기를 바랐다. 글쎄, 어렸을 때의 내가 보기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앎’을 주는 것은 과학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긴 하지만. 이런저런 고민 끝에 기계공학과 학부에 진학했고 자연스럽게 대학원도 기계공학과로 갔다. 그런 와중에도 할 수 있는 한 ‘과학적’인 연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 또 어쩌다 보니 지금은 이공계열 연구자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첫 대학원을 포기하고 나온 후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며, 나는 어찌 되었든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업을 위한 공부 말고도, 내가 알고 싶은 것을 탐구하는 공부를, 학교 밖에서 스스로 해보기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연구자가 아닌 시민을 대상으로 열리는 강의도 많지만 또 여러 학교 혹은 학교에 명확하게 적을 두고 있지 않은 연구자들이 모이는 장소는 생각보다 많았고, 거기에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 대학원생과 교수님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같이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생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형이상학이나 현상학, 정치철학, 인류학, 사회학, 예술 비평 등을 잡다하게, 나름의 깊이를 따라 배워나갔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명확했다. 가령 나는 늘 잡다하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모임에 갈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새롭게 알아가며 대화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신선한 자극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성과 불연속성과의 끝나지 않는 싸움처럼 느껴졌다.[3]  학교 밖에서 공부란,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 순간 내 손을 떠나버린다. 게다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딱히 누가 잡고 누구는 잡히는 관계도 아니어서, 모인 사람 모두가 동시에 서로를 잡아야 한다.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관계였지만, 여러모로 많은 힘을 들여야 하고 또 힘을 들이기를 멈출 수 없는 관계였다. 혹은 적어도 나에겐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2024년 11월 22일[4] , 대학원에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때문이었다. 자기 가운데에 도서관을 품고 있는 학교 캠퍼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캠퍼스에 있을 사람들 때문이었다. 꼭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겠지만 나와 만나서 공부하러 나와주었던 사람들을 보고 싶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을 만나러, 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 학과에 도착했다. 물론 내가 특히 관심을 가져왔던 학문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학과라는 것, 정말 깊이 있게 배우고 싶은 분야들을 다루는 학과라는 점이 선택에 있어 중요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이 과학에 대한 나의 오래되고 깊은 관심과 연결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과학기술계에서 있으면서 내가 해왔던 일들 ― 연구뿐만 아니라, 내 골치를 아프게 했던 그 연구 과제의 이런저런 행정 업무들 ― 을 스스로 이해하고 의미화하는 데에 결정적이리라는 점이 학과 선택에 있어 중요했다. 그리고 내가 항상 말을 걸고 싶은 집단, 잘하고 있다고, 혹은 더 잘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은 집단이 과학기술자들이라는 점과 그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이 학과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점도 중요했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으로,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를 넘어서, 여기에 공부하는 사람들, 함께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래서 이 학과에 들어왔고, 그래서 행복합니다. 끝. 하하. 그냥 이렇게 끝내고 싶기도 하지만, 이 글은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렇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이 학과에서의 공부는 쉽지 않고, 때로는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서 배우고 연구하는 일들에서 분명한 즐거움과 흥분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글을 이대로 끝내지 않는 건, 내가 짧게나마 이 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우리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 우리가 여기서 함께 ‘과학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수업에서, 콜로키움이나 세미나에서, 전공자 모임에서, 혹은 학과 라운지에 앉아서, 우리는 함께 공부한다. 그리고 이때 ‘함께’라 함은, ‘같이’일망정 ‘똑같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수업에서 같은 읽기 자료를 읽고도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다른 질문을 품는다. 학문적 관심이 전혀 다름은 당연하고, 다른 정도를 떠나 서로의 학문적 관행과 주제에 대해, 당사자들이 들으면 서운할 만한 의구심을 표현하기조차 한다. 같은 것을 공부하지도, 같은 방법론을 공유하지도, 같은 태도와 방향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기묘하게도, 나는 바로 이러한 어긋남들이 있기에,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또 계속해서 함께 공부할 만하다고 느낀다.

질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자란 ‘개념의 친구’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조금 변형하면, 과학학과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학과에서 공부하는 우리들은, 말하자면 ‘과학의 친구’이다. 물론 그것이 꼭 우리 각자가 과학과 사이가 좋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하니까 더 모질게 말하는 우정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누가 더 과학과 친한지 잴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5]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모두 ‘과학’에 대해, 그리고 ‘과학’을 향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고, 또 ‘과학’에 대해 더 알아볼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나는 과학학과 사람들 하나하나를, ‘친구’라고 부르기엔 다소 쑥스럽더라도, 적어도 ‘친구의 친구’라고는 생각할 수 있다고 느낀다. 물론 나를 반갑게 맞아준 덕분에 과학이야 어찌 됐든 간에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 아직 친구가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혹은 아마 끝내 친구까지는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앉아 있고, 서로 다르게 공부하면서도, 함께 공부하고 있다. 우리가 ‘친구의 친구’라는 조건 아래에서.[6] 

그러니까, 이 글을 나와 함께 공부한 이들에 대한, 나의 ‘친구의 친구’들에 대한 감사 인사로 끝낼까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종종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는 사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저 건너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종종 눈에 띄는 정도였을 수도, 혹은 아니꼽거나 쟤는 왜 저러나 싶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럼에도 나와 같이 이 장소에 함께 앉아서 공부해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해두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공부하자고도. 졸업을 앞둔 사람들은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1] 질 들뢰즈‧카르멜로 베네, 허희정 옮김, (2005).『중첩』, 동문선, 117.

[2] 강정섭, (2025).「휘말리는 사람들: 이주민-되기와 돌봄으로 만드는 세계」(미발표 원고)

[3] 다행히도,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2020년에 처음 만나 2022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5년째 거의 매주 세미나를 이어가면서 함께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동안 계속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의 반쯤은 이 사람들 덕분이다. 얄궂다고 해야 하나 혹은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처음 만날 때는 나만이 대학원생이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대학원생이다.

[4] 정확하진 않다. 몇 년째 일기를 쓰는데, 매일매일 쓰자고 해놓고 매번 귀찮아서 미루다가 며칠 어치를 한 번에 쓰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짜가 가끔 뒤섞인다.

[5] A를 두고 ‘누가 더 A와 친한 친구인지’ 다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것을 섣불리 재려는 시도가 보는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6] 이 지점에서, ‘친구의 친구’가 남은 아닐지라도 종종 남보다 못한 관계일 때도 있음을 지적하는 눈 밝은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가끔 친구끼리도 철천지원수라도 된 듯이 싸우곤 하는데, 친구의 친구면 오죽하겠는가. 그러다가 또 데면데면하게 잘 지내기도 한다. 인간사 그런 거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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