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죽음의 애도를 넘어 상호의존의 정치로
: 『자연의 죽음』 다시 읽기*
박상현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석사과정
palpitate1118@snu.ac.kr
서론: 자연의 정치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의 『자연의 죽음』은 과학을 바꿔 놓은 책이다. 과학이 자연에 대한 지식 체계라고 할 때,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도, 이 책은 세계를 바꿨다. 자연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얼마나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있는지를 밝힌 딱 그만큼 말이다.
자연은 아주 정치적인 문제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인가? 우리에게 익숙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자연을 개발할 것인가, 아니면 보호할 것인가? 하지만 인간만이 정치적 주체이고 자연은 통제의 대상이라는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의 문제는 인간과 외따로 떨어져 발생하지 않으며, 그 문제에 따라 자연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모든 행위자의 삶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자연에 대해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고, 계급, 인종, 성별 등의 사회적 범주에 따라 다른 상황에 처한다. 따라서 자연의 정치는 자연을 사회적 요소와 분리된 것으로 상정하고 그를 되살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관계의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자연을 재구성해내고, 그 관계를 유지하고 돌보는 문제다.
작금의 ‘인류세’ 담론은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의 자연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망가지고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러나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자연의 문제에 대한 태도는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양분화되어 있다. 한편에는 인류의 기술 발전으로 결국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구가 이미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그러나 둘 모두는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에서의 실천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언젠가 도래할 이상적 미래를 무작정 기다리거나 반대로 그저 절망에 휩싸여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실에 집중하며 ‘트러블과 함께’해 나갈지를 고민해야 한다(도나 해러웨이, 2021: 11-13).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자연의 정치가 요청되고 있다.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상호의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처한 체제는 어떻게 다시 이해되고, 또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요원하지만, 위기는 코앞에 와있다.
이 글은 캐롤린 머천트의 『자연의 죽음』을 비판적으로 다시 읽는 것이 자연의 정치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죽음』은 16, 17세기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를 둘러싼 지식과 정치를 역사적으로 분석했고 이후의 환경운동, 여성운동, 에코페미니즘 등의 정치적, 사상적 조류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출간된 지 40년도 더 된 책을 이제 와서 다시 읽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로 이 책은 자연의 문제가 처한 역사적 현재성을 보여준다.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요청하는 ‘트러블과 함께’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나 우주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삶의 지평에서 출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연의 죽음』이 다루는 16, 17세기는 우리가 여전히 처해있는 ‘근대성’이라는 질문이 출현한 시기다. 근대세계로의 이행에서 나타난 자연의 문제를 분석하는 시도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조건 짓고 있는 역사적, 구조적 측면들을 고찰하게 해준다. 둘째로 『자연의 죽음』은 자연의 문제를 상호의존적 관계 안에 위치시킨다. 이 책은 자연을 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생태계’로 이해하고, 자연에 개입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를 정당화하고 새로운 개입을 창출하는 세계관, 그 안에서 연결되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와 권력관계를 드러낸다. 셋째로 이 책이 갖고 있는 규범성은 자연을 정치적 문제로 사고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자연의 죽음』은 책이 쓰이던 1980년 당시의 세계가 겪고 있던 환경, 여성 문제에 대해 대안적인 관점을 제공하고자 했다. 따라서 저자의 분석과 평가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규범성이 전제되어 있다. 이 규범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자연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데에 참조점이 된다. 이처럼 『자연의 죽음』은 자연의 문제를 상호의존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오늘날에도 재독해할 가치가 충분하다.
물론 『자연의 죽음』에 대한 평가와 논쟁은 이미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이 책은 진보의 상징이었던 근대과학의 이미지를,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를 낳은 권력적 지식 체계로 바꾸어냈다. 그리고 그 분석을 현대의 사회 문제와 연결하여 환경운동, 여성운동, 그리고 자연과 여성의 지배를 연결해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실천적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영향력은 위축되었다. 자연과 여성의 관계에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했고, 유기체적 세계를 낭만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이 핵심적이었다. 이에 다양한 학자들이 비판에 대응하며 『자연의 죽음』이 가진 의의를 변호하고 되살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글 역시 기본적으로 『자연의 죽음』의 의의를 재해석하려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자연의 죽음』이 어떤 한계도 갖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자고 제안한다. 앞선 두 비판은 책이 가진 한계를 ‘잘못’ 이해했고, 그에 따라 책의 의의를 부당하게 가려버렸다.
이를 밝히기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자연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하되, 각 쟁점에 관련된 분석의 구체적 평가로 논의를 확장한다. 다음으로 『자연의 죽음』이 수행한 분석을 비평하고, 이를 관통하고 있는 규범성을 해부한다. 후반부에서는 책이 갖는 한계와, 그것이 해결됐을 때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본질주의나 유기체적 세계에 대한 낭만화라는 비판은 오해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생명과 죽음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한계로 작동했음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역할은 한계를 극복하고 의미를 갱신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에코페미니즘의 계보에만 갇히지도, 본질주의의 오류나 유기체적 세계에 대한 낭만화로 부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자연의 죽음』은 상호의존적 세계에 대한 체제 분석, 그 세계를 바꿔낸 자연과 과학의 정치적 문제를 밝혀낸 작업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자연의 죽음』의 궤적: 본질주의와 낭만화라는 오명?
『자연의 죽음』은 17세기를 전후하여, 서구 유럽의 자연에 대한 관점이 유기체론에서 기계론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 살아있고 내적인 힘을 가진다고 여겨지던 자연은 죽은 존재로 이해되어갔다. 이 같은 ‘자연의 죽음’은 인식뿐 아니라 실제 자연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그 직접적인 결과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착취였다. 역사 속에서 자연은 자주 여성과 동일하게 이해되고 유비되어 왔다. 그런데 자연이 죽은 존재, 곧 불활성의 통제 가능한 대상이 되면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착취가 정당화, 강화되었다. 저자는 이 문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누락된 유기체론 중 일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안적 가능성들을 재독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자연의 죽음』은 출간 전후 1970~80년대의 여성, 환경, 반전 운동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며 탄생했으며(Merchant, 1998: 198), 그 목적 자체가 역사적 분석을 통해 현실의 문제와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머천트는 “과거의 해석은 현재를 보는 관점을 제공하고 바꿀 힘을 준다”고 말하며, 현대 시장경제의 착취에 대항하는 여성, 생태적 관점을 전개하겠다고 천명한다(Merchant, 1989: xx). 이 목적에 맞게 책의 영향력은 학계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운동과 대중매체를 넘나들었다. 책은 출간된 직후 페미니스트, 환경주의자, 과학기술사가들에게 특히 많이 읽혔고, 의회, 언론 매체에 언급되기도 했다(Merchant, 1998: 201). 머천트 자신이 현실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 역사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에, 『자연의 죽음』이라는 한 권의 책은 그토록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죽음』이 남긴 의의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로 진보와 근대성에 대한 믿음을 비판했으며, 둘째로 자연에 대한 지배와 여성에 대한 지배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과학이 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셋째로 자연과 인간의 동반자적 윤리를 촉구하는 흐름의 기반을 다졌다(Bauhardt, 2022: 8). 이성이나 합리성을 통해 인류를 해방시켰다는 믿음을 받았던 근대과학이, 이제는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를 촉진했다고 이해되었다(Park, 2006: 490).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례는 근대과학의 방법을 수립했다 여겨지는 베이컨(Francis Bacon)의 경우다. 머천트는 베이컨이 마녀재판에서 여성을 고문하는 기계적 도구를 제안하였고, 그가 인류의 진보를 위해 제안한 과학적 방법은 여성을 고문하고 강간하는 비유를 통해 자연 착취와 지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고 폭로했다(Merchant, 1989: 168-169).
하지만 『자연의 죽음』에 다양한 비판 역시 제기되었다. 첫째로 책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고발의 대상이 된 과학을 옹호하려는 비판이 나타났다. 과학사 분과 내에서, 몇몇 이들은 과학이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를 초래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주장이 편파적이며 오늘날의 가치로 과거를 평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관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Park, 2006: 490). 역사 연구의 정치성이나 당파성에 대한 논쟁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어떤 역사 연구든 연구 목적, 사료 수집과 해석 등의 모든 과정에는 항상 정치적 관점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치가 개입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편파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 가치 판단이 적절한지 평가해야 한다.[1]
둘째로 책이 담고 있는 페미니즘, 생태주의적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비판이론과 사회운동의 영역 안에서도 성찰적인 비판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핵심적인 쟁점이 있었다. 우선 후기구조주의와 제3물결 페미니즘의 지지자들은 『자연의 죽음』과 그 영향을 받아 발전한 에코페미니즘이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본질화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Thompson, 2006). 『자연의 죽음』은 양육자 어머니로 비유되는 자연을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그것이 자연과 여성의 본래적인 속성인 것처럼 설명해 여성을 양육하는 존재이자 자연 친화적인 존재로 본질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본성을 상정하는 ‘자연’과 ‘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한편 중세의 유기체적 세계를 기계적 세계와 대비해 낭만화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Bauhardt, 2022: 10). 발 플럼우드(Val Plumwood)는 기계적 사고가 근대 이후에야 등장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계적 태도는 인간-자연 관계에 근본적으로 배태된 문제라고 지적하며 머천트의 주장을 비판했다(Baudhardt, 2022: 11-12).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근대 과학의 기계적 세계관이 마녀사냥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보는 머천트의 입장을 비판했다. 유기체적 세계에도 이미 노예제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단에 대한 박해와 몰살도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이 간과되고 있으며, 마녀박해는 중세 기독교, 과학의 합리주의적 주장, 근대의 관료적 법정의 절차가 뒤섞여 형성되었다는 것이다(실비아 페데리치, 2022: 302-303). 『자연의 죽음』이 가졌던 영향력과 의의는 80년대의 환경, 여성운동이라는 시대적 맥락에 기대고 있었기에, 머천트에게 이러한 성찰적 비판의 흐름은 더 뼈 아팠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자연의 죽음』이 정치적인 ‘자연의 문제’에 어떤 참조점을 제공하는지 밝히는 것이기에, 바로 이 성찰적 비판들에 해명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위의 두 쟁점에 대해, 다양한 학자들은 『자연의 죽음』을 변호하려고 노력해왔다. 첫째로, 『자연의 죽음』이 자연과 여성의 관계를 본질화했다는 쟁점에 대해, 옹호자들은 이 책이 여성과 자연이 연관된 방식을 역사적, 경험적으로 밝혀내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라고 말한다(Thompson, 2006: 510). 이는 본질화가 아니라 여성과 자연에 대한 착취가 구조화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분석한 ‘구조주의적 접근’에 가깝다는 것이다(Bauhardt, 2022: 8). 즉 본질주의라는 비판에 대한 변호의 핵심은 『자연의 죽음』이 ‘역사적 분석’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질주의라는 쟁점에 집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자연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 과연 충분했거나 타당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본질주의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자연-여성 관계에 대한 분석의 적절성으로 논의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자연의 죽음』이 유기체적 세계와 기계적 세계를 단절적으로 구분하고, 전자를 낭만화한다는 쟁점에서 비판자들은 유기체적 세계와 기계적 세계가 16~17세기를 전후로 단절적으로 나뉘지 않으며, 이전의 시기에 여성과 자연에 대한 착취가 덜했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자연의 죽음』이 유기체적 세계와 기계적 세계를 구분해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두 세계의 경계를 완벽히 단절적으로 보지는 않으며, 유기체적 세계를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유기체적 세계관을 낭만화했다는 주장은 책이 중세-근대의 이행기를 유기체적 세계와 기계적 세계로 분석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자연의 죽음』에 대한 쟁점은 그 쟁점과 관련한 분석을 더 구체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음 절에서는 앞선 쟁점들에 대해 머천트가 자연과 여성의 관계, 중세-근대 이행을 분석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평가하며 해명하고, 나아가 책의 ‘진짜’ 한계를 비판할 것이다.
체제 분석: 누가, 왜 자연을 죽였나?
우선 책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서 머천트의 문제의식과 목적을 살펴보는 것이 이후의 논의를 평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책은 1장에서 여성과 자연이 연관되어 그려진 역사적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자연의 문제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틀을 자연과 여성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구축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후 2~6장은 중세 사회의 유기체론을 다루는데, 특히 5장~6장은 유기체적 사회를 지탱하던 여성-자연 개념과 그에 대한 착취를 마녀사냥과 같은 여성의 생산, 재생산 통제라는 키워드로 분석한다. 이 두 장은 이후 7장~10장의 기계론 논의로 넘어가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곧 유기체론에서 기계론으로의 이행에서 핵심은 생산, 재생산을 통제하는 권력임을 암시한다. 마지막 두 장은 간접적으로 대안을 탐색하는 장들이다. 11장은 앤 콘웨이(Anne Conway)를 중심으로 역사상 지워진 여성 학자들의 역사를 조명하고 생기론적 철학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12장은 근대 과학 이론의 종합을 선도한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와 뉴턴(Isaac Newton)에게 자연의 능력을 설명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었음을 밝힌다. 이는 자연의 생명력이라는 문제가 근대 이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남아있으며, 따라서 오늘날에도 역시 이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침내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기계적 세계관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며 자연과 여성에 대한 착취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유기체적 세계관의 대안적 가능성을 재독해할 것을 주장한다.
책의 구성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은, 책의 목적이 단순히 유기체론에서 기계론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이 설명은 자연-여성 관계와 이에 개입하는 생산, 재생산 통제의 권력관계를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은 ‘자연의 죽음’이라는 사건, 곧 살아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자연이 죽은 것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자연을 죽어있다고 이해하는 방식에 수반되는 지적, 정치적, 사회적 관계와 권력이 무엇인지, 그에 따라 자연에 실제로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지에 집중한다. 따라서 책에 대한 적절한 비평은 이러한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이 충실했는지, 그에 전제된 규범적 가치판단이 타당한지를 따져 묻는 것이 되어야 한다.
1)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의 역학: 생태계 모델과 세계관
머천트가 수행한 분석의 핵심은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의 역학이다. 비록 머천트가 이 역학을 하나의 정리된 체계적 틀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전반적인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 역학관계를 그려낼 수 있다. 우선 유기체적 세계에서 자연과 여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유비되었고, 질서, 무질서라는 양면적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저자는 1장에서 자연과 여성을 유비한 사례를 분석한다. 자연은 르네상스 시기 살아있는 유기체이자 양육자 어머니로서의 지구로 그려지곤 했으나(Merchant, 1989: 3), 다른 한편 자연과 여성은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한 존재로 이해되기도 했다(127). 이 구도에 변화를 준 핵심 원인은 자본주의적 경제양식의 출현이라는 경제적, 사회정치적 조건의 변화였다. 숲, 농장, 습지 등에서 인클로저와 개간, 채굴이 이루어졌고, 자연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개발에 제약을 가하던 기존의 유기체적 세계관이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42-43). 그러한 변화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여성은 무질서하다는 이미지가 강화되고 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127-128). 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생산, 재생산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통제도 이루어졌다. 과학은 이 무질서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했다(40-143). 그에 따라 여성의 수동성과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강조되었고, 기계로서의 우주라는 관념이 등장했다(148). 관점의 변화는 또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아갔다. 베이컨의 종합을 통해 자연과 여성을 통제하는 과학적 방법이 등장했고(169-170), 기계론은 무질서를 해독하는 질서, 권력을 실제로 만들어냈다. 이는 중앙집권적 통제라는 정치적 조건(205), 화폐의 교환과 양적 산술이라는 시장 경제의 힘과 친화적이었다(212). 산업주의의 발전 속에 인간의 힘을 증대하는 풍차, 수차 등의 비자동기계와, 질서의 상징으로 작동하는 시계 등의 자동기계가 사용되어 세계를 바꾸어 갔다(216-217). “은유로서 기계론은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명령하고 재구성”했다(215).
저자는 자신의 분석을 위해 ‘생태계’ 모델과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생태계(ecosystem) 모델은 인간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총체로서 자연을 이해하는 틀이다. 이는 자연과 문화를 이분하지 않고, 두 하부체계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파악하려는 시도다(42-43). 한편 세계관이란 유기체, 기계와 같이 지배적인 비유를 통해 ‘우주, 사회, 자아를 통합하는 하나의 문화적 실재’다(xxii). 다시 말하면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특정한 비유나 상징이 있고, 특정 시대와 사람들이 이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때 세계관은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일 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적으로 바꾸는 힘을 가진 것으로 제시된다. 곧 세계관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과학 및 철학 지식, 문화적 담론과 실천을 통합하는 일종의 연결고리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세계관 안의 과학과 철학 역시 경제적, 사회정치적 요소와 늘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다. 이때 사회정치적 조건과 과학 지식 사이의 관계를 하나가 다른 하나를 결정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역사적 조건들이, 기계론 철학의 구체적 내용을 결정하거나 사회적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 안에서 철학을 구성하는 동력을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그것들은 자연에 대한 어떤 가정들은 그럴듯하게 만들고 다른 것들은 무효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95-196) 각 시대에 이용가능한 사고들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그중 특정한 몇 가지가 사회적 조건에 의해 정당화되고 살아남는다. 사회적 조건, 소위 ‘외부 요인’들은 연구 프로그램의 정당화와 문제 설정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공헌한다. 이처럼 과학과 문화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발전한다(xxii-xxiii). 『자연의 죽음』은 생태계 모델을 통해 자연과 문화를 분리하지 않고 인간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경제적, 지식적,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통합된 세계관은 이 생태계를 유지하고 변화시킨다.
과거 유기체적 세계관 속에 공존했던 자연-여성의 양면적 의미는 자본주의적 경제 양식의 출현 속에 위협받았다.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질서로서의 자연-여성 이미지가 강조, 채택되고 그에 대한 통제가 요청되었다. 그에 따라 여성의 생산/재생산 통제권은 박탈되었고, 과학과 자연철학은 이 정당화 과정에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연과 여성을 무질서하며, 통제가 필요하고, 불활성이며 조작가능한 대상으로 보는 기계적 세계관이 출현했다. 기계론은 정당화를 넘어 자연-여성을 착취하는 당대의 경제적, 사회정치적 변화를 강화하였고, 세계의 가치체계를 새롭게 재편하고 또 세계를 실제로 바꾸어 갔다.
2) 생산/재생산 통제를 통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
첫째로, 자연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머천트의 분석이 본질주의의 오류를 낳았는가? 그렇지 않은데, 머천트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착취의 원인을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구조적인 요소에서 찾기 때문이다. 자연과 여성이 결합하는 양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공통적으로 생산과 재생산 통제에 주목한다. 유기체론에서 강조되는 생명력과 양육이라는 비유, 기계론에서 강조되는 무질서와 자원이라는 비유 모두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동력으로서 자연과 여성에 집중한 결과다. 그리고 여기에 개입하는 힘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노동에서의 공사 구분, 재생산 영역의 제도와 국가 권력 등이다. 자연에 대해서는 숲, 농장, 습지 등에서 일어난 개간, 채굴이(Merchant, 1989: 42-43), 여성의 경우에는 마녀사냥과 공사 구분, 산파의 역할 등이 구체적으로 지적된다(209, 234). 마녀재판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했고 과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권위로 기능했다(138-140). 또한 생산의 영역에서 여성은 가정에 유폐되어 갔고, 자본주의적 농업 하에서 더 적은 임금을 받아 남편에게 의존해야 했다. 재생산 통제권을 유지하고 있던 ‘산파’의 역할도 남성 외과 의사 면허제로 위협받았고 그 역할을 남성 의사들에게 내주게 됐다(151-152).
머천트는 여성의 몸이 자연에 친화적이라는 생물학적 환원론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재생산의 영역에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는 여성이 자연과 본질적인 친연성을 갖기 때문에 여성만이 재생산의 주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머천트는 재생산을 둘러싼 사회적 위계화를 분석한다. 머천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남성의 ‘정액’이 재생산에서 능동적 역할을 했음을 주장했고(16),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이를 계승해 재생산에서 여성의 수동성, 남성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론을 확립했다(157-158). 재생산 영역에서 남성의 능동성을 강조하며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는 사실은, 재생산이 본질적으로 여성만의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해당 영역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여러 행위자가 상징적, 실질적으로 경합하는 문제였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곧 재생산 문제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고, 재생산이 이해된 특정한 방식, 그에 참여하는 행위자들 사이의 사회적 위계화가 중요했다는 사실이 자연철학자들에 대한 머천트의 분석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저자의 자연과 여성 관계에 대한 분석이 놓치는 지점도 분명 있다. 지배가 구조화되는 지점을 설명하면서도, 이를 비판하는 기준이 모종의 원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계적이다. 머천트가 주로 비판하는 지배의 실제 양상은 첫째로 자연과 여성에 대한 훼손, 둘째로 인간의 능동성과 남성의 능동성에 각각 대비되는 자연과 여성의 수동성이다. 이들은 상호 연결된 권력적 작동의 결과다. 훼손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 여성은 수동적 대상으로 그려지고, 이 때문에 다시 훼손은 더 강화된다. 예컨대 훼손의 경우 농장, 숲, 습지 등에서 이뤄지는 채굴과 개간 등이 야기하는 자연의 훼손, 여성에 대한 고문과 강간이라는 신체적 훼손의 비유가 지적된다. 이때 훼손에 대한 비판은 훼손되지 않은 원 상태를 상정하고 긍정하게 된다. 하지만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 원본을 상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애초 그 원본이 차별적으로 구성되었음을 가리고 또다른 억압을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어머니이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될 때, 여성은 다시 차별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어머니 역할’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수동성의 경우 자연에 깃든 생명을 없애고 이를 불활성이자 수동적인 대상으로 보는 관점, 생산/재생산 영역에서 상징적, 실질적으로 여성의 통제권을 박탈하고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 비판된다. 수동성에 대한 비판에서도 수동적인 것과 대비되는 능동적인 상태에 우위가 부여된다. 그러나 능동성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종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능동성을 상정하고, 능동성과 수동성을 구분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누락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문제에서 수동성 비판에만 그치는 논의는 남성이 허락한 능동성, 혹은 남성과 동일한 능동성을 획득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고 상정된 능동성 자체가 남성중심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감춘다.
우리는 여기서 훼손되지 않은 상태와 완벽한 능동성을 지배에 피해를 입은 원본으로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여성의 원본 이미지가 이미 인간중심적,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여성 지배의 경우, 단순히 여성이 수동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남성과 같은 지위를 갖추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여성에 대한 재현이 남성의 시선에서 구성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능동-수동을 구분하는, 정치나 경제 영역의 통제권을 배분하는 남성중심적 권력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여성적인 것’은 철학의 ‘구성적 외부’였다는 이리가레(Luce Irigaray)의 지적처럼, 중요한 것은 여성이 남성-여성 이분법에서 열등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분법에서 그려진 ‘여성’은 남성중심적 시각의 여성일 뿐이며, 사실 여성적인 것은 이 이분법을 지탱하기 위해 배제되고 이분법 바깥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여성은 늘 재현불가능한 존재로 남아있다(Butler, 2011: 16).[2] 따라서 훼손되지 않고 능동적인 것으로 그려지는 어머니 지구, 혹은 여신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타자화되거나 차별적으로 재현되었는지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연의 죽음』에서는 그보다는 자연과 여성이 훼손되고 수동적인 존재로 이해되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자연-여성 관계를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그 지배를 형성하는 사회구조적 힘으로 분석해냈고, 특히 재생산을 둘러싼 몸과 물질에 관한 논의 역시 생물학적 환원론이 아닌 사회적 담론과 위계화 과정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를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훼손, 그들에게 강요된 수동성에 반하는 원본성을 긍정하는 데에 그쳤고 지배에 대해 비판할 적절한 이론틀을 구성해내지는 못했다. 이는 자연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본질주의는 아니지만, 침해 받지 않은 원본을 상정하고 이를 규범적으로 더 나은 상태라고 여긴다는 점에서는 본질주의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본질주의’라는 말의 함의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감수하자면 말이다. 이러한 분석에서의 약점은 다음에서 다룰 중세-근대 이행에 대한 논의에서도 등장하며, 결국 이 책이 가진 규범성 비판을 통해 종합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3) 유기체론과 기계론 사이의 전유, 포섭, 긴장
두 번째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주제에 대해 살펴보자. 『자연의 죽음』은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가는 역사적 경로 안에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 구도의 강화를 그려낸다. 이는 ‘과학혁명’에 대한 다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자연의 죽음』은 중세 유기체적 세계관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이자 낭만화였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두 세계를 정말 단절적으로 그려내는지, 그리고 유기체적 세계를 긍정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머천트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낭만화했다는 비판들이 보는 것보다 유기체론에서 기계론의 이행을 훨씬 더 역동적으로 분석했다. 책은 우선 유기체론, 기계론 각각을 통일적이고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 중세 사회의 유기체적 유토피아에는 위계적 유기체론, 공동체적(communal) 유기체론, 혁명적 유기체론이 공존하고 있었고(Merchant, 1989: 70), 유기체적 철학들은 위계적 유기체론을 수용한 신플라톤주의, 변증법적 변화를 강조한 자연주의, 파라셀수스(Paracelsus)와 같이 물질과 정신을 일원론적으로 통합하고 활동적으로 본 생기론으로 구분된다(02-103). 기계론 안에서도 메르센느(Marin Mersenne), 가센디(Pierre Gassendi), 데카르트(Rene Descartes), 홉스(Thomas Hobbes) 등의 사상이 가지고 있었던 차이가 조명된다. 게다가 책은 이들 다양한 유기체론과 기계론 사이의 경합과 조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경합과 조정의 첫 번째 핵심 키워드는 ‘전유’다. 유기체적 세계관들은 기계적 세계관에 전유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유기체적 세계에 있었던 자연에 대한 마술적 조작의 믿음은 기계적 세계에서 기계적 조작으로 전유되었다(111). 또한 유기체적 세계에서는 자연 착취를 어머니 지구에 대한 침해라고 비판하고 이를 제약했지만, 기계적 세계에서는 자연과 여성이 무질서한 존재로 그려지게 되면서 침해가 정당화되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로서의 어머니 지구 비유는 자연 착취를 허용하는 식으로 전유되었다(41). 두 번째 키워드는 ‘포섭’이다. 저자는 유기체론이 기계론에 순응하고 포섭된 형태로 ‘자연의 관리’라는 관리주의적 보호주의가 형성되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생기론이나 공동체적 지향은 사라지고, 효율과 생산성을 위한 자연 보호라는 논리가 들어선 것이다(238). 세 번째 키워드는 ‘긴장’이다. 책은 대표적인 근대 자연철학자들인 뉴턴과 라이프니츠 역시 자연의 유기체적 생명력을 해명해야 했음을 밝힌다. 라이프니츠는 현상만이 기계적이고, 실재의 세계는 유기체적이라고 생각했다(281). 그가 제시한 세계의 기본 단위인 ‘모나드’는 살아있는 것이라 이해되었고, 따라서 변화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의 결과였다(283). 기계론적 세계관을 체계화했다고 평가받는 뉴턴조차도, 생명력을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중력과 함께 ‘발효’를 생명의 원천으로 제시했다(285-287).
이는 결국 유기체론과 기계론을 이분화된 관점으로 보기보다, 둘 모두를 자연과 여성을 이해하고 그에 개입하는 실천이자 세계관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의 ‘죽음’은 종결된 사건이 아니다. 유기체론에서는 물론이고 기계론에서조차, 자연의 생명과 죽음이라는 질문은 늘 대답해야할 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의 죽음이 역사적으로 구축된 현상일 뿐, 자연에 대한 다른 개념이 구축된다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저자는 1950년대 이후의 생태계 개념이 수학적 모형화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지적하며, 유기체적인 철학과 기계적인 철학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고, 두 관점 사이의 긴장이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진다고 말한다(103). 이처럼 이 책은 유기체론과 기계론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렇다면 책이 유기체적 세계를 무비판적으로 긍정하고 낭만화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이 책은 유기체적 세계에 존재하던 권력관계 역시 밝히고 있다. 예컨대 저자는 어머니 지구에 대한 일부 전원적 이미지는 남성의 행복을 제공하는 종속적, 수동적 존재로 그려졌고 자연을 상품, 자원으로 조작할 가능성을 이미 갖고 있었다고 비판한다(Merchant, 1989: 8-9). 또한 어머니 지구의 이미지가 자연의 훼손에 대한 모종의 윤리적 제약으로 작동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했지만(29), 앞서 지적했듯 어머니의 자궁을 훼손하고 강탈해선 안 된다는 식으로 여성이 수동적 피해자로 그려지면서, 근대 과학의 출현 이후 여성에 대한 개입이 정당화된 후에는 제약이 쉽게 착취로 뒤집힐 수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41). 이처럼 책은 유기체적 세계관을 무조건 긍정하기보다, 기존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저자의 비판적 문제의식은 약화된다. 저자는 다양한 유기체적 세계관 중, 생기론적 철학의 계보에서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Merchant, 1989: 268). 생기론은 물질과 정신을 통합하고, 자연에 생명력과 활동력을 부여하는 사상이다. 이들은 ‘자연의 죽음’과는 대비되게 자연의 생명력에 주목하여, 오늘날 기계론적 환원이 낳은 자연과 여성 착취의 문제를 극복할 가능성을 갖는다고 제시된다. 파라셀수스의 이론 속에서 자연은 이용되긴 하지만 일방적 이용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의 유기적 연대를 구성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의 사상은 급진적 면모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엘리트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서 자연에 대한 중요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각자가 자연에 대한 마술적 조작을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민중의 봉기, 반역에 기여했다고 여겨진다(119-121). 나아가 저자는 앤 콘웨이, 반 헬몬트(Jan van Helmont),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생기론 발전의 흐름을 그려낸다. 특히 살아있는 모든 것에 본래적 가치가 있다는 윤리관을 부여하는 생기론이 기계론에 대한 규범적 억제력을 가졌다고 설명하며(253-254), 역사적으로 공유지 점거, 평등 공동체 건설, 재화의 공유와 가부장제 비판을 수행하는 급진적 사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122-124). 그러나 ‘생기론’이라고 이야기되는 흐름을 오늘날 경험하는 문제들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데, 생기론의 영향과 효과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미 밝혀주고 있듯, 자연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자연-여성의 이미지를 침해 받는 어머니 자연으로 그릴 경우, 이는 자연-여성에 대한 침해를 적극 장려하는 기계론으로 전유될 수 있다. 설사 생기론이 혁명적이고 급진적 사상과 연결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그러했던 것이지, 그 사실 자체로 생기론이 더 나은 사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앞서 저자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 능동적인 상태를 원본으로 상정한다는 비판에서 언급했듯이, 자연-여성을 생기론적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 역시 남성적 시선에서 자연-여성을 타자화, 이상화하는 과정일 수 있다. 생기론이 가졌다고 평가되는 자연 착취에 대한 규범적 제약이나, 자연과 인간 사이 연대의 가능성은 그것이 어떤 역사적 조건 위에서 구축되는지에 따라 현실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생기론의 내용이 설사 이제까지 착취당해온 자연과 여성에게 일종의 활동성을 부여하는 외양을 띠더라도, 부여된 활동성의 구체적 성질, 그것이 활성화되는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억압적인 효과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유기체적 세계관과 기계적 세계관 사이의 전유, 포섭, 긴장의 관계를 분석하고, 유기체적 세계에서 이미 존재했던 권력 구도도 분석해내면서 중세-근대 이행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생기론 철학의 계보를 오늘날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게 하는 역사적 맥락을 누락했다. 이는 훼손과 수동성에 대한 비판적 이론틀이 부재한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능동적이고 활성화된 자연 이해를 비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죽음』이 과거의 유기체적 세계 일반을 모두 낭만화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생기론을 대안적 가치로서 낭만화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규범성: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자연의 죽음』이 보여준 가치는 여성과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비판한 것에 있다. 특히 생태계와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그러한 지배가 총체적인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며, 과학 지식도 이에 기여하는 권력 체계의 일부였음을 드러내 주었다. 책이 보여준 체제 분석의 여러 측면들은 각각 구체적인 규범성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 자연-여성 관계를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힘으로 분석해낸 점은, 자연이 인간 사회와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있으며 다른 정치적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 따라서 자연-여성 지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둘째로 몸과 재생산에 관한 사회적 담론과 위계화를 밝힘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환원론이 아니라 자연과 물질에 대한 위계화 실천을 읽어내야 한다고 요청한다. 이는 자연에 대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회정치적 이해와 개념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셋째로 세계관 사이의 전유, 포섭, 긴장의 관계를 분석하고, 유기체적 세계의 권력 구도 역시 비판한 역사적 분석은, 우리 자신도 지금 처해있는 세계의 권력 구도를 분석하되, 그것이 늘 역동적으로 변화한다고 이해하게 이끈다. 이는 선형적 진보 서사에서 벗어나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현실에서 자연의 문제를 해결할 실천적 개입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자연-여성 지배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에 대한 구조적 분석, 몸과 물질에 대한 정치적 이해, 비선형적이고 실천적인 역사적 관점이 『자연의 죽음』이 가진 핵심적인 의의다. 하지만 책이 가진 규범성의 한계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시 닫아버린다.
이전 절에서 살펴본 분석에서의 한계들이 규범성의 한계를 암시한다. 자연, 여성에 대한 훼손과 그것의 수동적 재현을 원본성에 근거해 한계적으로 비판하는 문제, 그리고 역사적 맥락을 누락하고 생기론 철학 계보 일반을 긍정하는 한계는 연결되어 있다. 책 전반에서 드러나는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명’을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전제가 그 한계들을 낳는다. 훼손되지 않고 능동적인 의미로서의 생명에 그 자체로 더 나은 가치를 부여하며, 이를 갖고 있는 자연과 여성은 보호받고 지켜져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에 따라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인 ‘자연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자연에 대한 착취를, 반대로 생명의 회복은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저자 본인이 애써 자연의 죽음을 둘러싼 경제적, 사회정치적 조건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석의 한계와 이를 지탱하는 생명 중심의 규범성 덕분에 『자연의 죽음』은 그것을 야기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기획이 아니라, 생기론의 옹호를 통해 죽음을 애도하고 생명을 되살리려는 기획이 된다. 그러나 이 애도라는 정치적 ‘정동’, 혹은 전략은 문제를 안고 있다.
생명에 대한 긍정, 죽음에 대한 애도는 책이 보여준 생명과 죽음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체제 분석의 성과를 가리고, 자연과 여성을 비롯한 상호의존적 관계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킨다. 무엇보다 ‘죽음’ 자체에 집중하게 되면서 유기체적 세계관이 도덕적 우위를 획득하고, 그것과 기계적 세계관 사이의 이분법이 결과적으로 다시 강화된다. 사실 『자연의 죽음』의 분석 안에서도 죽음은 그 자체로 지배와 착취인 것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착취를 ‘정당화’하는 의미화 과정이다. 그리고 생명의 추구 역시 그 자체로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앞서 페데리치가 지적했듯 자연이 살아있던 유기체적 세계에서도 노예화와 착취가 이미 일어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생명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들이 어떻게 착취와 권력관계의 작동에 의해 전유, 활용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죽음에 대비해 생명을 긍정하는 머천트의 대안적 요청은 『자연의 죽음』이 이미 수행하고 있던 사회구조적 분석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자연에 대한 이해를 생명과 죽음이라는 양자택일로 환원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생명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면 구조적 지배를 더 설명할 이유가 사라진다.
생명에 대한 애도가 도덕적 규범으로 논의를 제한하고 권력관계와 지배에 대한 분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은 머천트의 이후 사상적 전개에서도 징후적으로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천트의 사상은 ‘자연의 죽음’을 비판하는 것에서, ‘동반자 윤리’를 요청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왔다.[3] “동반자 윤리는 인간과 비인간 공동체를 위한 최대의 선은 서로 간의 살아있는 상호의존성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캐롤린 머천트, 2007: 131). 특히 머천트는 동반자 윤리를 에코페미니즘에 가해지는 본질주의 비판의 해답으로 제안한다. 여성을 양육자로 본질화하는 대신,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을 동등하게 간주하며, 인간과 자연을 동등한 동반자로 보자는 것이다. 자연을 동반자로 구성하면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생겨나고, 성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른 인간과 여타 존재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며, 자연에 여성성을 부여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캐롤린 머천트, 2007: 290-291). 이처럼 동반자 윤리에서는 자연과 인간 모두를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존중할 것이 요청된다. 그러나 현실에 자연과 여성에 대한 착취가 새롭고 더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인간과 자연이 생명으로서 동등하다는 주장으로 곧바로 나아가는 것은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을 위계화하고 구분하는 지배에 대한 분석을 생략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결과적으로 은폐하는 것이 된다. 물론 동반자 윤리의 명제에는 ‘여성, 소수자 및 자연을 윤리적 책임성 규율 속에 포함할 것’이 명시되어 있다(캐롤린 머천트, 2007: 131). 그러나 착취의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 ‘포함’의 논리는 오히려 착취적인 현실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여성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흐름과 대조하면 이런 지점이 더 잘 드러난다. 『자연의 죽음』의 문제의식은 마리아 미즈(Maria Mies)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로 연결된다고 평가받는다(Baudhardt, 2022: 8-9). 미즈는 머천트의 사고를 발전시켜 근대 자본주의가 여성에 대한 재생산 착취를 시초축척으로 하여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비아 페데리치도 재생산 위기와 사회적 투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이라는 두 축으로 자본주의 발달을 설명하는 자신의 기획을 머천트와 마리아 미즈의 계보 위에 놓고 있다(실비아 페데리치, 2022: 33). 이들은 『자연의 죽음』이 보여준 여성과 자연에 대한 생산/재생산 착취의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을 더 적극적으로 개진해나갔다. 하지만 정작 그 출발점을 제공한 머천트 자신은 이러한 권력 분석을 체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자연의 죽음』이 가진 생명 중심의 윤리적 비판을 유지, 확장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워시(Kenneth Worthy)는 자연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게 된 것이 문제를 야기한다고 말하며 논의의 초점을 죽음에서 분리로 변경한다. 자연을 기계로 상상하게 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친밀한 연결을 없앤다. 이는 우리가 자연에 기여하는 방식과 우리 선택의 영향도 감춰버리기 때문에, 그 영향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비윤리적 결과들이 나타난다(Worthy, 2019: 53-54). 하지만 이 역시 결국에는 그 분리가 자연의 죽음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으며, 반대로 ‘친밀함’을 바탕으로 생명에 대한 긍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지적한 한계들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죽음』이 보여준 자연-여성 지배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에 대한 구조적 분석, 몸과 물질에 대한 정치적 이해, 비선형적이고 실천적인 역사적 관점이라는 의의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분법 앞에서 멈춰 서게 되었다. 생명을 긍정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규범성은 사회구조적 분석의 범위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훼손되지 않고 능동적인 자연과 여성의 원본을 추구하고, 생기론 철학에 대해 탈맥락적으로 긍정하는 한계의 토양이 된다.
결론: 죽음의 애도를 넘어 상호의존의 정치로
머천트는 16, 17세기의 ‘새로운 과학’의 출현이 단지 새로운 사고의 혁명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에 관계된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에 대한 지배관계가 재배치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단순히 자유로운 유기체적 세계에서 착취적인 기계적 세계로의 이행이었던 것이 아니라, 두 세계의 경합과 조정 속에 나타나는 복잡한 권력 구도의 전환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상호의존적 세계에서 과연 자연과 여성에 대한 어떤 구조적 힘들에 처해있는지, 그 안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와 자연-여성의 재현 방식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생태,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도록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시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기계론에서든 유기체론에서든, 특정한 방식으로 착취의 대상이 된 자연과 여성에게 더 나은 자리를 찾아주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이는 생기론이 주장하듯 자연에 그 자체의 생명능력과 활동력을 부여하기만 하면 달성되는 문제도 아니다. 타자화나 대상화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능력과 행위성을 부여하고, 또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을 만들 수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의 역사적 자원을 소환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그것은 초역사적인 가치로 긍정될 수 없으며 매 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구체적 효과 속에 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자연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만 생명이 다시 소생되기를 바라는 태도도 아니다. 우리는 자연의 죽음과 생명 사이의 경계를 그려온 방식을 비판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연의 문제가 어떻게 구성되어왔고, 또 오늘날의 정치, 지식, 물질과 도구의 관계 속에서 이는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상상해야 한다. 『자연의 죽음』은 자신이 선택한 생명 중심의 규범성에 의해 한계를 드러냈다. 책이 가진 의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착취를 ‘죽음’ 아닌 다른 관점으로 비판하는 논의가 결합되어야 한다.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틀을 벗어나 자연을 재개념화할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이러한 재개념화의 작업에서, 자연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해러웨이의 이론은 좋은 참조점이 된다.
해러웨이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인 사이보그의 존재론을 제시한다(도나 해러웨이, 2019: 19).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이런 시도에는 생명에 대한 긍정이 개입하지 않으며, 기계가 부정적인 것으로만 묘사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과 기계가 뒤섞이는 과정을 포착하면서, 생명이나 자연에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는 본질주의가 해소될 수 있다. 물론 해러웨이의 사고에 생명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은 아니며, 그 고려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세계는 생명만큼이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다만 그 앞에서 화해나 복구가 아니라 ‘트러블과 함께하는 것’, ‘살기와 죽기의 방식들을 다시 만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도나 해러웨이, 2021: 21-22). 단순히 죽음을 애도하고 죽은 것을 되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생명 사이의 경계를 그리고,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죽고 살게 만들며,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관계 일체를 비판하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자연의 죽음』을 다시 보면, 생명을 회복하는 화해나 복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 안에서 자연의 삶과 죽음을 가르고 유지하는 방식을 꾸준히 추적하고 관계 맺는 실천이 요청된다. 이런 관계맺기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생명 중심의 규범성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더 새롭게 상상해 나갈 수 있다. 변화하는 자연과의 관계, 이에 개입하는 과학의 지배와 권력의 문제를 꾸준히 해명하는 실천적 대안을 요청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는 『자연의 죽음』이 보여준 분석적 가능성과 오히려 더 잘 공명한다. 책은 자연의 죽음을 둘러싼 지배의 역학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생명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더 큰 역학 속에 재구성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자연의 죽음』이 갖는 유산은 분명히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조건과 쟁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가장 핵심적인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엇을 논쟁하고 무엇을 상상할 것인지를 설정하는 일종의 사고 틀을 제공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죽음』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장르에 속한다는 파크(Katharine Park)의 분석은 타당하다. 이 책은 과학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바꾸어 놓고, 흥미와 관심사의 방향을 설정해주었다(Park, 2006: 494).
나아가 『자연의 죽음』은 유토피아적이고 대안적인 세계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해주었다. 자연-여성 지배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에 대한 구조적 분석, 몸과 물질에 대한 정치적 이해, 비선형적이고 실천적인 역사적 관점이라는 가능성들이 그것이며, 이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규범성을 벗어날 때 극대화될 수 있다. 구조적 분석은 마리아 미즈, 실비아 페데리치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체제 분석의 계보를 더 확장해 나갈 자원을 제공한다. 몸과 물질에 대한 정치적 이해는 몸이나 신체에 개입하는 역사성과 사회적 힘을 이해하려는 페미니즘 현상학이나 자연/문화 이분법에서 벗어나 물질의 행위성을 재구성하려는 신유물론 페미니즘의 흐름과 만날 수 있다. 비선형적이고 실천적인 역사적 관점은, 진보 서사에 국한되지 않고 현실의 세계관에 개입할 새로운 정치적 실천에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자연의 죽음』은 80~90년대 에코페미니즘 운동에서 이를 이미 보여주었고, 그 기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나 이 글에서 밝힌 의의를 포함하는 더 넓은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이런 흐름들이 만나 새로운 역사적, 정치적 유토피아를 그려 나갈 수 있다.
이는 결국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자연의 문제’를 정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과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공통의 체제 안에 놓인 상호의존적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여성을 둘러싼 지배 구조를 고발하고, 물질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탐색하고, 이에 입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상호의존의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 자연의 죽음을 애도하는 책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자연의 문제에 응답하는 책으로 읽어낼 때, 『자연의 죽음』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머천트는 자신의 두 아들과 떠난 여행에서, 협곡의 돌 더미들이 가진 생명력을 마주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선 그날 밤 숙소에 앉아 왜 과학은 자연을 죽은 존재로 바라보는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Merchant, 1998: 198). 머천트가 느낀 그날의 감정은 분명 소중한 것이었을 테다. 그러나 그 고민의 가치는 자연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연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의문을 품고 주의를 기울였던 점에 있다. 자연의 죽음에는 애도가 아니라 관심이, 자연의 죽음을 둘러싼 관계를 감각하고 거듭 재구성하는 상호의존적 정치가 필요하다.
댓글
댓글 쓰기